"마음 비우니 대세로, 희망 믿으니 챔프로"..김지현의 '메이저퀸 스토리'

by김인오 기자
2017.06.21 06:00:00

이데일리 오픈서 얻은 믿음 한국여자오픈서 결실
최종일 컨디션 나빴지만 '긍정의 힘' 믿어
14, 15번홀 연속 버디.."우승 보여"
턱밑 추격 정연주 따돌린 비결도 '여유'

KLPGA 투어 3승을 거둔 김지현이 19일 경기 성남에 있는 KG이니시스 본사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김인오 기자] “첫 우승의 기쁨이 아직 남아 있는데 어느새 메이저대회 우승까지 찾아왔네요. 꿈 속을 걷는 거 같아요.” 유쾌한 웃음이다. 18일 끝난 한국여자오픈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2010년 KLPGA 투어에 데뷔한 김지현은 지난 시즌까지 우승 없는 평범한 선수였다.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고비를 넘지 못했다. 좌절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고 말했다.

김지현 역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물은 달콤했다. 그럴 법도 하다. 지난 4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 with KFC 대회에서 기다리던 첫 우승을 따낸 김지현(26)은 S-OIL 챔피언십에서 다승자 반열에 오르더니 일주일 후 메이저대회 우승컵까지 품에 안았다. 어느새 그는 한국여자골프의 ‘대세’가 됐다.

3승을 하는 동안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를 모두 풀어놨다. ‘불운의 골퍼’, ‘실물이 더 예쁜 골퍼’, ‘방송인 성유리 남편 안성현 코치’, ‘김송희 퍼터’까지 화젯거리가 많았다. 인터뷰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때 김지현은 “일기를 써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고민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은 한국여자오픈 최종라운드 기상 순간부터 우승 확정까지 10시간의 ‘메이저퀸 스토리’다. 구술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아침 7시에 기상을 했다. 밤새 뒤척인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클럽하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친구들이 인사를 건넸다. 밝은 표정을 지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발목까지 좋지 않아 테이핑까지 했다. 선두 (이)정은이와는 3타 차다. 역전을 노려볼 수 있지만 컨디션이 제로다. “그래.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톱10을 목표로 쉬엄쉬엄 가보자.”

드라이빙 레인지로 이동했다. 연습 샷만으로도 그날의 성적을 가늠할 수 있다. 기대가 크지 않은 탓에 가볍게 힘을 빼고 스윙을 했다. 이게 웬걸. 샷 감이 너무 좋았다. 1~3라운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타를 맞아 나갔다. 그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터치감이 환상이었다. “욕심을 한 번 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톱10 목표는 그대로다. 욕심으로 경기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1번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많은 갤러리가 모였다. 나를 응원해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내가 지난주 우승자였구나’라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첫 티샷이 괜찮다. 긴장도, 떨리지도 않았다. 밤바다를 혼자 걷는 것처럼 모든게 평온했다. 연습장에서 느껴졌던 좋은 샷 감이 이어져 기분도 좋았다.

첫 버디는 2번홀에서 나왔다. 거리가 꽤 있었지만 퍼트감이 좋아 버디로 이어졌다. 4번홀에서는 2m 거리에 붙여 버디를 잡아냈다. 파3인 7번홀에서는 티샷이 짧았다. 이미 2타를 줄여놨기에 1타 정도는 잃어도 된다는 마음으로 어프로치 샷을 했다. 볼은 홀 방향으로 잘 굴러갔다. ‘파는 잡겠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볼이 사라졌다. 행운의 버디. 함성이 들렸고, 주먹을 불끈 쥐는 세리머니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전반에만 3타를 줄였다. 출발할 때 뒤져 있던 격차를 모두 만회했다. 하지만 버디는 나만 잡는 게 아니다. 내가 쉬우면 남들도 쉽다. “다른 홀에서 꽤 큰 함성이 여러 차례 들려왔기에 다들 잘 치고 있을 거야.”

후반은 버디를 욕심 버려야 한다. 특히 12, 13, 14번홀은 파의 가치가 버디와 같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12번홀은 무사히 넘어갔다. 문제는 13번홀이었다. 두 번째 샷이 해저드에 빠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보기를 하면 다행이지만 그 이상은 하루를 망칠 수 있다.

2클럽 내에 드롭하지 않고 좀 더 멀리 드롭존을 설정했다. 사실 난 어프로치 샷이 약점이다. 따라서 잔디가 짧은 페어웨이보다 러프 프린지를 선택했다. 공략은 굴리기. 그린 뒤쪽에 해저드가 또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핀을 노리기보다는 그린 앞에 떨어뜨려 홀에 굴리는 작전을 세웠다. 다행히 볼은 계획대로 움직였다. 홀에 바짝 붙어 버디만큼 기분 좋은 보기로 홀을 벗어날 수 있었다.

14번홀과 15번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아냈다. 행운이 따랐다. 14번홀에서는 피로감으로 티샷이 당겨졌다. 러프에 빠졌지만 파5라 버디 기회는 있었다. 다행히 세 번째 샷이 핀에 붙어 버디를 잡아 좋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다. 15번홀도 러프를 잘 이겨내 1타를 더 줄였다. ‘승리의 여신’이 조심스럽게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원래 스코어를 확인하지 않는다. 우승 인터뷰마다 “1등인지 몰랐어요”라고 해 오해도 많이 샀다. 시력이 나쁘다고 알려졌지만 좌우 0.7이나 된다. 보고 싶은 건 다 볼 수 있다. 18홀 내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코어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 그런데. 16번홀이 끝난 후 보고야 말았다. 2타 차 단독 선두였다. 2위는 친한 친구이자 같은 팀에서 운동하고 있는 (정)연주다. 오랜 기간 고생한 연주를 잘 알기에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우승해도 진심으로 축하해줄 거야.” 다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17번홀과 18번홀에서 타수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 홀에서 버디 퍼트가 홀을 길게 지나쳤지만 무난히 파로 막았다. 스코어카드를 제출하러 갔는데 관계자가 ‘연장전을 준비하라’고 했다. (정)연주가 1타 차로 따라붙었다. 연습장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기다렸다. 같은 조건으로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지난주 연장전에서 이긴 경험도 있어 자신도 있었다. (정)연주가 17번홀에서 보기를 범했다. 그것으로 내 우승은 결정됐다. 페어웨이를 걸어오는 (정)연주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많은 분이 연승 비결을 묻는다. 작년보다 표정이 여유로워졌다고 칭찬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특별하게 변한 것은 없다. 우승을 앞두고 무너진 수차례의 순간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단단해졌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