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장인 리더십] 6회초,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법

by정철우 기자
2007.11.15 08:21:27

▲ 박찬호-김성근 [사진제공=SK와이번스]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김성근 감독은 2002년 LG에서 물러난 뒤 2007년 SK 감독을 맡을때 까지 5년간 공백이 있었다. 지바 롯데 코치를 했던 2년을 빼도 2년간은 완전한 야인 신세였다.

그러나 김 감독의 존재감은 계속됐다. 그 사이 굵직한 제자들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박찬호(LA 다저스) 김병현(플로리다) 이승엽(요미우리) 등 한국을 대표하는 별들이 줄을 이어 그의 야구를 전수받았다.

박찬호 김병현은 메이저리그에서 최고를 경험했고 이승엽은 일본에 한국 야구의 혼을 심었다. 김 감독의 무엇이 이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

첫 단추는 ‘존중’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들이 이제껏 해낸 성과와 노하우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교육을 시작했던 것이다.

박찬호가 김 감독에게 처음 도움을 청한 것은 2003년 말이었다. 박찬호는 지인을 통해 김 감독에게 지도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때 김 감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일본 내 정보망을 동원해 좋은 투수코치와 훈련장소를 찾는 일이었다. 야인이던 김 감독에게 ‘박찬호 과외’는 자신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나 김 감독은 자신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다소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내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야. 대한민국 최고인데 함부로 하면 안되지. 가르친다기 보단 같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라고 답했다.

김 감독의 계획은 갑작스럽게 변한 박찬호의 스케줄 탓에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박찬호와 첫 대면부터 지금까지 그때의 마음 그대로 대하고 있다.

이승엽과 함께 생활했던 2005년. 김 감독은 올라오는 상대 투수마다 뚫어져라 폼을 관찰했다. 구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투수의 폼 속 버릇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눈에 띄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종이에 적어 직원을 통해 이승엽에게 전했다. 호흡이 잘 맞아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김 감독의 또 하나의 보람이었다.

그러나 늘 김 감독의 메모가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간혹 처음 접힌 그 상태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이승엽이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였다. 김 감독은 “승엽이도 버릇을 잡아내는 좋은 눈이 있어. 그럴 때 괜히 내가 본 것이 더해지면 헷갈릴 수 있잖아. 그럴땐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열정과 진실이다. 김 감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로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며 진심으로 그들의 성공을 기원했다

박찬호와 잦은 만남으로 신뢰가 쌓여가던 어느 겨울. 김 감독은 박찬호와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야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김 감독은 박찬호의 투구판 밟는 버릇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발까지 벗고 투구폼을 보여줬다. 그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김 감독은 “나중에 생각해보니 좀 창피했는데 그땐 그런 생각도 없었다”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승엽에게도 그 열정은 이어졌다. 이승엽이 좀처럼 페이스를 찾지못했던 2005년 시즌 초. 김 감독은 매일 경기 후 이승엽에게 특타를 시켰다. 좋은 폼을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에게 방패막이 돼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치 회의에선 이승엽의 부진에 대해 이런 저런 처방들이 나왔다. 그때마다 김 감독은 “기다려달라”며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승엽이 가뜩이나 힘에 겨운 상황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다간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타는 그들의 오만을 향한 소리없는 외침이기도 했다. 그들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선 이승엽이 갖고 있던 것을 찾는 수 밖에 없었다. 스윙을 하는 이승엽도 볼을 던져주는 김 감독도 파김치가 되는 밤이 계속됐고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목표한 바를 이루어냈다.

김 감독이 얼마나 세심한 것 까지 신경 썼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이승엽이 2005년 한참 주가를 올리던 5월 무렵, 김 감독이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일이다.

지인과 술자리를 하던 중 김 감독에게 이승엽의 전화가 왔다. 결승 홈런을 치며 히어로 인터뷰까지 했다는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김 감독은 지인에게까지 전화기를 건네주더니 수화기를 막고 “정말 잘했다고 크게 칭찬해주라”고 부탁했다. 지인은 한술 더 떠 “올해 잘하면 보너스 받아 술 한잔 사라”고 했다.

김 감독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통화가 끝나고 김 감독이 말했다. “지금 말 실수 한거야. ‘잘하면’이 아니고 ‘잘한다’고 했어야지. 승엽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한다면 앞으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

김 감독은 최고들의 스승으로 사는 소감(?)을 묻자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유? 그런건 잘 모르겠어. 그저 내가 맞고 틀리고, 잘 하고 못하고 보다 그 선수들하고 나하고 마음이 맞은거 아닌가 싶어.”

*덧붙이기 : 이승엽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2003년 말. 모 스포츠용품 회사 행사장에서 필자와 김 감독에 대한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대화의 앞 뒤가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이승엽은 “어휴, 김성근 감독님한테 배우면 하도 뛰어서 애들 무릎 다 나간대요”라고 말했고 우린 함께 낄낄 거렸다.

그리고 2007년. 이승엽은 한 인터뷰서 “만약 한국에서 뛰게 된다면 김성근 감독님의 팀에서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을 향한 진심은 언젠가 통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