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확대경]'종합 처방전' 필요한 한국 영화산업
by윤기백 기자
2025.12.04 06:00:00
[이데일리 스타in 윤기백 기자] 한국 영화계가 총체적 위기에 놓였다. 올해 600만 관객을 넘긴 한국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한때 흥행의 척도로 여겨진 ‘천만 배우’란 표현도 올해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올여름 극장가의 성적표는 이 위기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매년 성수기 극장가의 중심을 잡아주던 텐트폴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다. 중예산 영화가 붕괴된 상황에서 한국 영화의 기둥 역할을 하던 블록버스터까지 제 역할을 못한 것이다. 산업의 허리와 기둥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이 위기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최근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제작 환경, 지원 제도, 유통 구조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독립예술영화는 상영관 확보 자체가 ‘운’(運)의 영역이 됐고, 중예산 영화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투자처를 찾지 못해 사라지고 있다. 수백억 원을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도 흥행을 장담할 수 없다. 한 번의 실패가 곧 회사 전체의 리스크가 되는 구조가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2일 영화진흥위원회가 내년 중예산 영화에 20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영화계에서는 “중예산 영화만 살려서는 산업이 살아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업이 건강해지려면 독립예술, 중예산, 블록버스터 영화가 고르게 제작되고 소비되는 구조가 필수다. 어느 한 구간만 살리는 것이 생태계 회복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특정 영역만 지원하는 방식은 시장의 파이를 더 줄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부가 제시한 2030년 K콘텐츠 시장 300조·수출 50조 목표도 지금 구조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영화산업은 단순 소비재 시장이 아니라 창작·제작·배급·상영·인력 시스템이 맞물린 복합 산업이다. 그만큼 정책 역시 전체 체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지난 10월 열린 제2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그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 산업 관련 7000억 원 규모의 모태펀드에 중소기업뿐 아니라 대기업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넓히는 방안, 정부의 투자 대상을 기존 독립예술영화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상업영화까지 확대하자는 논의 등이 함께 포함됐다. 제작비가 폭증한 시대에 대기업의 참여를 원천 제한하는 것은 현실과 어긋난다는 비판이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
이와 함께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현장의 창의성과 속도에 맞춘 규제 개선’은 영화산업에 특히 절실하다. 영화산업 특성상 제작지원은 선정 이후에야 자금 조달·캐스팅·배급 협의 등 핵심 작업이 시작되는 만큼 연내 크랭크인 같은 촉박한 조건을 유예하고, 순제작비 외 별도로 운영되는 비용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더불어 한정된 문화재정을 감안해 다른 부처의 예산을 연계 확보하고, 민간투자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지금 한국 영화계가 직면한 위기는 한두 작품의 흥행 실패가 아니다. 독립예술영화가 숨 쉴 공간이 필요하고, 중예산 영화가 안정적으로 제작될 토대가 있어야 하며, 블록버스터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살아야 한국 영화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