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폭로'에 공든 탑 무너지는 프로배구...승부조작 파문 이후 최대 위기

by이석무 기자
2021.02.15 00:01:00

과거 학교 폭력 사실을 시인한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이재영(오른쪽), 이다영 자매. 사진=KOVO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겨울철 인기 스포츠로 인기몰이를 이어가던 프로배구 V리그가 ‘학교 폭력(학폭) 논란’으로 흔들리고 있다. 2012년 현역선수가 11명이나 영구제명 되면서 리그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승부조작 파문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다.

파문의 발단은 지난 9일이었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이재영·다영 자매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함께 배구 선수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현직 배구선수 학폭 피해자들입니다’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들은 쌍둥이 자매의 가해 사실을 열거하면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고 밝혔다.

그 내용이 충격적이어서 많은 배구팬들은 반신반의했다. SNS를 통해 관련 내용이 급속도로 퍼지자 이재영·다영 자매는 다음날 10일 각자 SNS에 자필 사과문을 올려 잘못을 시인하고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했다. 흥국생명 구단 역시 “선수들은 학생 시절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있다”며 “상처를 입은 피해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재영·다영 자매는 공개 사과 이후 팀 숙소를 떠나 집에 머물고 있다. 비난 여론이 워낙 크다보니 올 시즌 코트 복귀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주전 레프트(이재영)와 주전 세터(이다영)가 빠진 흥국생명은 팀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직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최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3연패 늪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13일에는 남자배구에서 학폭 논란이 불거졌다. OK저축은행의 송명근과 심경섭이 고교시절과 중학교 시절 후배 선수를 폭행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두 선수도 과거 학교 폭력 사실을 인정하고 구단을 통해 사과를 했다.

구단은 “가해선수들이 A씨에게 문자 메시지로 사과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글을 올린 A씨는 “단순히 괴롭히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는 점 본인들도 아셨으면 한다”며 “말도 안 되는 입장문과 사과는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과거 학교 폭력 연루를 시인한 OK금융그룹 심경섭(왼쪽)과 송명근. 사진=KOVO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프로배구는 지금 혼란에 빠졌다. 자칫 추가 폭로가 나와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남자프로배구 한국전력은 소속 선수단을 상대로 전수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장병철 한국전력 감독은 14일 삼성화재전을 앞두고 “학폭 논란이 가시화되면서 선수들도 동요하고 있다”며 “잘 해결돼 선수들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다른 구단들도 비공개로 자체 조사를 진행했거나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선수들이 속한 팀은 후속대책을 고민하고 있다. 흥국생명과 OK금융그룹 구단 모두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며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고 선수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징계에 대해선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프로배구에서 이같은 사건의 전례가 없다보니 징계 수위를 정하기가 어렵다. 비난 여론과는 별개로 팀 입장에선 선수 보호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프로배구 밖에서는 비슷한 선례가 있긴 하다.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는 2018년 1차지명 신인 안우진의 과거 학교 폭력 사실이 드러나자 정규시즌 50경기 출장 정지라는 자체 징계를 내렸다.

아마야구를 이끄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도 안우진에게 ‘3년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3년 이상 자격 정지를 받으면 국가대표 선발 자격이 박탈된다. 사실상 국가대표로 뽑힐 수 있는 기회를 막았다. 다만 프로야구를 관장하는 KBO는 “아마추어 시절 일어난 일을 가지고 프로에서 처벌하기 어렵다”며 안우진에게 따로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프로배구를 주관하는 한국배구연맹(KOVO) 역시 ‘아마추어 시절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프로에서 징계할 수 있느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처벌한 근거도 마땅치 않다. 일단 소속 구단의 자체 징계를 지켜본 뒤 상벌위를 연다는 입장이다.

대신 KOVO는 대한민국배구협회와 협력해 학교폭력 근절 방안을 모색한다는 계획이다. KOVO 관계자는 “프로에 오더라도 이전 잘못이 확인되면 연맹에서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프로배구는 승부조작 파문으로 큰 위기를 겪은 뒤 선수와 구단, 관계자들이 리그 인기를 살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그 결과 지금의 프로배구는 최고 인기스포츠라고 불리는 프로야구와도 견줄만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2019~20시즌 여자부 평균 시청률은 사상 처음으로 1%대(1.05%)를 돌파했다.

하지만 이번 학폭 논란으로 그동안 힘들게 쌓아온 노력이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실추된 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한 리그 구성원들의 강도높은 자정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