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변신' 故 장진영이 남긴 9편의 영화들
by김용운 기자
2009.09.04 07:29:30
| ▲ 故 장진영이 생전 출연한 9편의 영화에서 모은 그녀의 연기 모습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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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김용운기자] 그녀의 전생은 들판에 홀로 핀 한 송이 국화였을까? 아니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한 마리 제비였을까?
위암으로 1년여 간 투병해 오던 배우 장진영이 국화가 피고 제비가 남쪽으로 돌아가는 가을의 초입, 2009년 9월1일 육신의 호흡을 멈추고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향년 38세.
장진영은 20대 초반 미스코리아 충남 진이란 타이틀을 업고 연예계에 진출했다. 당시 장진영은 '배우'가 아니라 15초 짧은 CF속 모델이었다. 이후 정해진 코스처럼 장진영은 TV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입문한다. 이때 까지만 해도 장진영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매 영화마다 끊임없이 변신하는 배우로서 ‘한국영화 신르네상스를 이끌 주역 중 한 명이 되리라’고 예상하는 이는 드물었다.
장진영이 스크린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1999년 이광훈 감독의 판타지 영화 '자귀모'였다. '자살한 귀신들의 모임'이란 뜻의 '자귀모'에서 장진영은 주인공인 저승사자 칸토테라스(이성재 분)의 옛 연인인 의사 서인영 역으로 출연했다.
개봉 전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을 맡은 이성재와 김희선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영화 개봉 후 영화 관계자들은 장진영에게 주목했다. 장진영이 판타지 영화 속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아 작품의 균형을 맞춰주었기 때문이다.
장진영이 '자귀모'를 통해 스크린에 신고식을 했다면 2000년 2월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은 배우 장진영의 가능성을 시험해본 작품이었다. 장진영은 이 영화에서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송강호 분)를 프로레슬러로 훈련시키는 장관장(장항선 분)의 딸 민영으로 출연했다.
장진영은 주인공인 송강호에 비해 연기 초보였다. 송강호는 스크린 데뷔 전 연극무대를 통해 10여 년 간 연기력을 갈고 닦았던 베테랑이었다. 그런 송강호 앞에서도 장진영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몫을 해냈다. 영화 출연 두 번째인 신출내기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장진영은 2000년 10월, 한국 최초의 파이어 액션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싸이렌'에서 소방관인 주인공 엄준우의 연인 하예린으로 출연해 신현준과 호흡을 맞췄다. 아쉽게도 '싸이렌'은 서울 관객 6만여 명을 모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싸이렌’은 이후 장진영의 팔색조 연기의 도화선이 됐다. 주어진 이미지에 안주하는 연기자보다는 매번 해 보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배우로서의 '자아'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장진영은 이때부터 '변신'을 키워드로 삼는 배우로서 진정한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장진영이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 살에 선택한 영화는 윤종찬 감독의 스릴러 ‘소름’이었다. 2001년 8월에 개봉한 ‘소름’에서 장진영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겼던 긴생머리를 자르고 남편의 구타에 신음해 쾡한 눈빛과 불안정한 표정의 여주인공 선영으로 분했다. 평단과 관객은 장진영의 파격적인 변신에 놀랐다.
장진영은 선영 역을 위해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웠고 김명민 과의 베드신을 감행했다. 윤종찬 감독은 그녀의 '독기'에 놀랐다고 후일담을 남겼다. 그만큼 장진영은 이전 어떤 작품에서도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모습을 관객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이는 ‘예쁜 이미지’에만 안주하지 않으려는 장진영의 도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장진영은 ‘소름’을 통해 영화 출연 네 번 만에, 첫 주인공이었던 작품으로 여배우들의 꿈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2001년 열린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당시 여우주연상 후보로는 이미연, 이영애, 전도연, 전지현, 김희선 등 당대의 톱스타가 망라해 있었다.
눈물을 쏟으며 시상식 무대에 오른 장진영은 역대 청룡영화상 최장시간의 수상소감을 남길 만큼 다소 횡설수설했다. 그만큼 자신의 수상을 예상치 못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청룡영화상 뿐만 아니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과 포르투갈에서 열린 제22회 판타스포르토 영화제도 각각 신인연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또한 현역 감독들이 주는 디렉터스컷 시상식에서 장진영은 올해의 연기자상을 수상했다.
미스코리아로 연예계의 발을 내딛은 뒤 장진영은 10여년 만에 배우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한 것이다. 그리고 미스코리아 출신에서 배우로 인정받는 경우는 장진영 이전까지는 거의 없었다.
'소름'을 통해 변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이겨내는 근성을 보여준 장진영은 이후 충무로의 여자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하며 활발하게 관객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 중 첫 번째 작품은 이정재와 호흡을 맞춘 멜로 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2002년 5월 개봉한 이 영화에서 장진영은 전작이었던 ‘소름’의 선영과는 180도 다른 밝고 따뜻한 연희 역을 맡아 ‘소름’의 그림자를 지워냈다.
이후 장진영은 박해일과 함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국화꽃 향기’를 선택한다. 2003년 2월 개봉한 이 작품에서도 장진영은 이전에 자신이 맡지 않았던 캐릭터를 연기한다. 장진영이 맡은 여자주인공 희재는 대학 후배인 인하(박해일 분)의 사랑을 받아 들여 결혼하지만 이내 시한부 삶을 선고받는 비련의 인물. 당시 장진영이 ‘국화꽃 향기’의 희재처럼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진영은 ‘국화꽃 향기’ 이후 차기작 선택에서도 변함없이 '변신'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다. 2003년 8월 개봉한 권칠인 감독의 ‘싱글즈’에서 일과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고 싶은 스물아홉의 직장여성 나난 역을 맡아 자신의 캐릭터를 경신 한 것. 장진영은 ‘싱글즈’의 오프닝 장면에서 하얀 속내의에 양치질을 하는 유쾌한 모습으로 단번에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이는 흥행과 직결됐다.
‘싱글즈’는 230만 관객을 동원해 그간 흥행에 목말랐던 장진영의 ‘한’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었다. 또한 청룡영화상 심사위원들은 장진영에게 다시 한 번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나난을 통해 일상적 연기를 자연스럽게 소화한 장진영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장진영은 ‘싱글즈’의 성공 후에 나난과 유사한 캐릭터 제의를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장진영의 마음은 익숙함에 대한 안주 보다는 해보지 않은 캐릭터에 대한 도전에 가 있었다. 장진영은 ‘소름’의 윤종찬 감독이 연출한 ‘청연’에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였던 주인공 박경원 역을 맡아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체화해냈다.
2005년 12월 개봉한 ‘청연’에서 장진영은 ‘푸른 제비’ 청연호를 타고 마음껏 하늘을 누볐지만 개봉 초기 박경원의 친일논란 등으로 흥행은 참패했다. ‘싱글즈’ 촬영 이후 약 1년간의 다른 작품을 고사하고 오로지 '청연'에만 매진했던 장진영의 노력과 연기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청연’의 실패가 장진영의 원칙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장진영은 ‘청연’ 이후 김해곤 감독의 2006년 9월 개봉작 ‘연애,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참)에서 구질구질한 일상에서도 순정을 꿈꾸는 술집여자 연희로 스크린에 돌아온다. 거친 욕설과 몸싸움을 서슴지 않는 연희 역시 장진영이 이전 작품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캐릭터였다.
자신과는 전혀 달라 영화를 그만둘까 생각할 정도로 연희란 캐릭터는 장진영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장진영은 배우였다. 관객들에게 늘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겠다는 장진영의 의지는 연희를 자신의 일부로 녹여냈다. 결국 장진영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며 연희란 인물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살려냈다. '연애참'의 연희는 장진영에게 제6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겼다. 그리고 그녀가 생전 출연한 9편의 영화 중 마지막 캐릭터가 됐다.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이 장진영의 죽음에 대해 “그녀를 잃은 것은 한국 영화계의 큰 손실이다”고 말한 것은 의례적인 추모사가 아니었다. 그만큼 장진영이 소화한 캐릭터의 폭이 넓어서였다. 국민배우 안성기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힘과 독특한 개성을 지녔던 배우”로 장진영을 평가했다.
‘자귀모’ 이후 ‘연애 참’까지 장진영의 출연작을 보면 어느 하나 겹치는 캐릭터가 없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술집여자.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 시한부 삶을 마감하는 비련의 여인과 하이톤의 목소리로 까르르 웃으며 우정과 사랑 직업적 성공을 고민하는 서른 초반의 직장여성.
폭력에 신음하며 남편의 살해를 모의하는 주부에서 남자 친구의 기억을 찾아주려 애쓰는 사랑스런 애인. 무뚝뚝한 표정으로 소심한 남자를 매트에 내리 꽂는 레슬링 트레이너까지 스크린 속 장진영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관객들을 찾아왔다.
영화배우로 입문과 동시에 매번 멈추지 않았던 변화는 그녀의 연기에 깊이를 더했다. 그래서 장진영의 삶에 대해 김주하 앵커는“깊이 있는 배우의 짧은 생”이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