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장인 리더십] 9회초, 잠들지 않는 야인
by정철우 기자
2007.11.23 08:10:25
| ▲ 김성근 감독이 팬들이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해 강의하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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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8회말에 언급했던 것처럼 김성근 감독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선 대쪽같은 소신을 앞세워 당당하게 맞섰다. 당연히 구단과 충돌이 잦았고 2002년 LG에서처럼 실적을 내고도 해임되는 일도 생겼다.
자연스럽게 야인으로 지내는 시간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야구를 떠나본 적은 없다. 그의 야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되거나 할땐 야구가 지겹거나 짜증스러웠을 만도 하건만 멀찍이 도망가거나 일부러 외면해본 적은 없다.
감독으로 지낼 때나 유니폼을 벗었을 때도 그는 늘 야구와 함께 했다. ‘야구인’ 김성근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가장 활발히 하는 활동은 아마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이다. 전국에 퍼져있는 제자들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달려가 힘을 보태준다.
소문이 퍼져 생면 부지의 지도자들로부터도 연락이 오곤 하지만 그때도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짐을 꾸려 떠난다. 심지어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의 지도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 종일 땀을 흘린 적도 있다.
2002년 11월 LG에서 해임된 이후 2년간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인스트럭터로 성균관대 오키나와 전지 훈련에 합류해 선수들을 지도했었다.
김 감독을 아끼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김 감독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수도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길을 고생스럽게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 자택인 성수동에서 수원 성대 야구장까지는 지하철로 왕복 3시간(김 감독은 아직 차도 운전 면허도 없다)이나 걸렸다.
김 감독의 회갑연을 주도하기도 했던 김기태 요미우리 코치는 “감독님이 학교 가는 건 이제 그만 하셨으면 좋겠다. 이제 한국 야구의 큰 어른으로 대접만 받아도 모자란데...”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꿈쩍도 않았다. “가끔 사람들이 알아보고 “왜 지하철 타고 다니세요”라고 묻기도 해. 하지만 난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나”라며 묵묵히 계속 그 길을 갔다.
장외 지도자로의 왕성한 활동은 인연의 끈을 길게 이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2002년 LG서 잠시 한솥밥을 먹었던 이상훈(은퇴)의 경우 서울고 시절 40여일간 김 감독의 지도를 받았었다.
김 감독은 이상훈이 2002년 미국 생활을 마치고 LG로 복귀했을 때 인사차 찾아 오자 “너도 남자고 나도 남자다. 남자끼리는 많은 말 하는 거 아니다. 서로 알아서 하자”고만 한 뒤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김 감독은 이상훈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이상훈은 필요할때마다 마운드에 올라 승리를 지켜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둘 사이의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인 생활의 남는 시간은 언론사 해설위원과 야구팬과의 만남으로 채워진다. 해설위원(혹은 객원기자)는 감독을 그만두면 으레 거쳐 가는 코스다. 그러나 김 감독은 이마저도 매우 열정이 넘친다.
야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줄 수 있는 기회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일반 팬부터 자신보다 연배가 아래인 제자급 지도자들까지다.
해설위원으로 관전평을 쓸 때는 선수의 장.단점을 세세하게 분석하는가 하면 그날 경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은 눈치 보지 않고 철저하게 지적했다. 때로 그의 글이 현장 지도자들의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소신껏 밀어부쳤다.
성의없이 슬쩍 스쳐보고 쓰는 글이 아니었다. 스포츠 투데이 해설위원 시절 있었던 일이다. 한국시리즈 4차전이 끝나고 중간 점검을 할 수 있는 글을 부탁했을 때 그는 이런 내용을 보내왔다.
“4차전까지 현대 선발 투수들은 452개의 공 중 370개의 공을 바깥쪽으로 승부했다. 그 중 00%가 변화구였는데...” 그때 데스크를 보던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는 “야, 이거 정말 세어보고 쓴 걸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김 감독은 감독의 입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꼼꼼하게 기록하며 원고를 준비했다. 그가 관전평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의 데이터를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팬들을 향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다가선다. 세미나나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가능한 짬을 내 참석하려 한다.
김 감독은 2004년 명지대학교 기록과학대학원 초빙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돈이나 명예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강사료는 강의 후 학생들 맥주 한잔만 사줘도 모자랐고 야구인으로서 명예를 더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결강 한번 없이 학기를 모두 마쳤다. 실제 기록의 활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전력분석팀에서 일하는 제자를 불러 특강까지 했다.
야구가 단순히 치고 던지고 달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 속의 흐름을 궁금해하고 알고싶어하는 팬들이 늘어날수록 한국 야구기 비옥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참고삼아 김 감독이 2003년 명지대 특강때 팬들에게 했던 강의 내용 몇가지를 전해본다.
15타수 5안타라는 기록이 있다고 치자. 3할대 타율이다. 야구는 실패하는 스포츠라는 것이 이런 점이다. 다른 스포츠는 7할을 성공해야 한다고 하는데 7할을 실패해도 어깨에 힘줄 수 있다는 점은 야구의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타율을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점수 차이,안타 내용, 직선 타구나 아니냐, 타구의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데이터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선동렬과 송진우는 번트 수비에 능한 투수다. 송진우는 상대가 번트를 하려들면 구속을 줄여 들어가고, 선동렬은 그대로 던지는 편이다. 이럴 경우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송진우의 경우에는 버스터가 용이하고, 선동렬의 경우에는 번트앤드런을 해보는 것도 괜찮다. 번트앤드런을 쓰는 것은 선동렬이 번트 수비에 자신이 있는 탓에 때로는 포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수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역이용한다면 타자와 주자가 모두 살 수 있다.
KIA 타이거즈 포수 김상훈을 보자. 도루저지율이 좋은 선수다. 2002년 LG 감독때 그 선수에게 14번을 도루 시도했는데 겨우 3번만 성공했다. 근데 그 3번이 모두 마르티네스였다. 마르티네스의 도루를 살펴보니, 볼카운트가 모두 볼카운트 0-1이었다. 가만히 따져보니 0-1상황에서는 스트라이크 잡느라 주자 견제에 미흡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KIA와 플레이오프서 이 점을 파고들어 좋은 성과를 거둔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