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SRE][WORST]점점 커지는 등급 상향 요구
by유재희 기자
2018.05.16 15:18:55
[이데일리 유재희 기자]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설문(SRE) 항목 중 하나인 기업별 등급수준 적정성 설문(워스트레이팅·Worst Rating)에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시장 참여자들은 그동안 등급 하향에 익숙해진 신용평가사에 등급 상향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시장이 개별 이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등급에 대한 감시가 촘촘해지고 있다. 상환 능력과 상관없이 현재의 등급이 적정한가에 대한 평가가 더욱 세밀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워스트레이팅은 회사채를 분석·운용하는 시장전문가들이 봤을 때 신용등급이 기업 펀더멘털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묻는 것으로, 등급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총 40개 후보군 가운데 응답자별로 5개 이내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상향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 하향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에 각각 표기하는 방식이다. 만약 평가사별 등급이 다른 ‘스플릿’ 기업을 선택했을 경우 높은 등급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면 ▲, 낮은 등급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면 ▼에 각각 표기하도록 했다.
이번 워스트레이팅에서는 ‘나인원 한남’ 사업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대신에프앤아이가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설문에 참여한 유효응답자(회사채업무경력 1년 미만 제외) 188명 중 50명(득표율 26.6%)이 대신에프앤아이(A+)의 신용등급이 적절치 않다고 평가했다. 크레딧 애널리스트(24명)와 채권매니저(19명) 그룹별로도 각각 가장 많은 표를 던졌다. 특히 50명 모두 등급의 하향 조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대신에프앤아이는 지난 25회 설문에서 워스트레이팅 9위로 처음 이름을 올렸고 26회 5위를 거쳐 이번에 불명예 순위 1위에 오르게 됐다. 대신에프앤아이는 지난해 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분양보증 신청을 하고 분양을 개시할 계획이었지만 올 초 분양 승인조차 받지 못하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기아차는 34명(18.1%)의 표를 받아 워스트레이팅 2위를 기록했다. 26회 때는 3위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현대차의 현금성 자산이 8조원 규모에 달한다는 점에서 상환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내 초우량 신용등급인 ‘AAA’ 등급의 적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 속에 경쟁 강도가 심화되고 있고 주력 시장인 미국에서의 판매 부진, 주요 비용 급증 등으로 수익성 약화가 지속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올해 신차 효과에 따른 실적 개선이 뚜렷하지 않으면 신용등급의 하향 조정 압력은 더 커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납품비리와 분식회계 이슈 등으로 신용도에 금이 간 한국항공우주(KAI)가 워스트레이팅 3위에 올랐다. 188명 중 33명(17.6%)이 현재 등급인 ‘AA-’에 의문을 표했다. 지난 26회 SRE에서 워스트레이팅 1위에 이름을 올리면서 한국기업평가와 NICE신용평가는 종전 ‘긍정적’이었던 아웃룩을 ‘부정적’으로 낮췄고, 다른 신평사보다 한 노치(단계) 높은 ‘AA’ 등급을 제시했던 한국신용평가는 ‘AA-’로 하향 조정했다.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여전히 등급 적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33명 중 28명은 등급을 더 내려야 한다고 응답한 반면 5명은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답했다.
한 SRE 자문위원은 “한국항공우주의 경우 펀더멘털의 문제와 정치적 이슈가 맞물려 있어 시장의 의견이 엇갈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수리온 헬기 납품 사업 정상화와 APT(미국 고등훈련기 교체사업) 수주 등으로 사업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시장의 우려도 잦아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27회 SRE 워스트레이팅에서 설문참여자들의 의견이 가장 팽팽하게 엇갈린 기업은 두산인프라코어(BBB)다. 총 13표(6.9%)를 득표해 제이비우리캐피탈, 포스코건설, E1 및 LS네트웍스와 공동 18위를 기록했다. 응답자 13명 중 6명은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답했고 7명은 하향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 SRE 자문위원은 “두산인프라코어는 자체 실적이 개선되고 있지만 소송 이슈와 계열사 지원 등의 이슈가 맞물려 있어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재무적투자자(FI)와 중국 자회사 DICC 매각과 관련해 7000억원 규모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아시아나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항공운임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장래채권 자산유동화증권(ABS)은 워스트레이팅 5~6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득표수는 각각 30표(16%), 28표(14.9%)에 달한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의 신용등급은 ‘BBB-’이며, ABS 등급은 이보다 두 노치 높은 ‘BBB+(sf)’인데 ABS에 부여된 등급 트리거(Rating Trigger)의 존재로 아시아나항공과 ABS는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아시아나항공의 유효신용등급이 BB+ 이하로 하락하면 매출채권 회수액으로 ABS 원리금 등을 우선적으로 상환해야 하는 ‘신탁조기지급사유’가 발생하는 구조다. 이 경우 아시아나항공의 유동성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나항공 등급에 대한 하향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은 시장의 평가가 얼마나 냉정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우려의 시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워스트레이팅으로 아시아나항공과 아시아나항공 ABS를 각각 선택한 크레딧 애널리스트 13명과 20명은 모두 등급을 내려야 한다고 답한 반면 채권매니저와 브로커, IB 그룹에선 아시아나항공을 선택한 17명 중 6명이, 아시아나항공 ABS를 선택한 8명 중 3명이 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답했다. 최근 항공산업 업황의 회복 기대감과 광화문 사옥 매각 추진 등 아시아나항공 측의 유동성 확보 노력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워스트레이팅 단골손님인 대한항공과 한진 역시 이번에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총 득표수 23표(12.2%) 중 상향해야 한다는 의견이 16표에 달했다. 특히 이중 채권매니저 등의 표가 12표를 차지했다. 현재 NICE신평과 한신평은 ‘BBB+’, 한기평은 ‘BBB’로 평가하며 스플릿(등급 격차)이 발생한 상태다. 시장에선 일단 NICE신평과 한신평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한항공, 한진 외에도 등급 상향 요구를 받는 기업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워스트레이팅 40개 후보군 중 10개 넘는 기업에 대해 등급 상향 요구가 컸다. 우리은행의 피인수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아주캐피탈과 실적 개선 및 재무안정성이 강화된 OCI, 에스케이하이닉스, 에스케이실트론, 그리고 눈에 띄게 업황이 좋아지고 있는 한화케미칼 및 한화, SK케미칼, 여천엔씨씨 등이 이에 해당한다. 아주캐피탈은 20표(10.6%) 가운데 14표가 현재의 ‘A’등급을 상향해야 한다고 답했고 OCI도 총 20표(10.6%) 가운데 17표가 등급 상향을 원했다. 실제 OCI는 설문 조사 기간 중 한신평과 NICE신평이 종전 ‘A’등급에서 ‘A+’로 올렸다.
에스케이하이닉스(AA-)와 에스케이실트론은 각각 17표(9.0%)를 받은 가운데 17표 모두 신용등급을 상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에 의견을 냈다. 에스케이실트론의 경우 한신평은 ‘A’, NICE신평과 한기평은 ‘A-’의 신용등급을 부여하고 있는데 크레딧시장 전문가들은 한신평 등급이 타당하다고 봤다.
한편 NICE신평은 SRE가 진행되는 동안 에스케이하이닉스의 신용등급을 ‘AA(안정적)’으로 상향 조정했다. 반도체시장의 지속적인 호황 속에 이익을 늘리며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반영됐다.
산은캐피탈(AA-)은 크레딧 시장에서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새다. 응답자 24명(12.8%)이 현재 신용등급에 이의를 제기했고 23명이 하향 조정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4년 연속 5위권에 있다가 9위로 순위가 밀렸다는 점이다.
한 SRE 자문위원은 “모회사 산업은행의 매각 이슈가 어느 정도 해소된 데다 재무구조 건전성이나 수익성이 상당히 좋아지고 있다”며 “과거 엄청난 손실로 자기자본의 30% 이상을 날리면서 시장 참여자들의 불신이 커진 게 아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을 겪으며 SRE 워스트레이팅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던 롯데쇼핑(AA+)과 호텔롯데(AA)는 이번에도 27표(14.4%)를 받으며 또다시 등장했다. 사드 이슈가 해소되고 있지만 중국의 롯데마트 매각 이슈가 해결되기 전까지 시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