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정훈 기자
2016.10.19 21:44:58
[이데일리 뉴스속보팀] 지난 2007년 11월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에 기권하기로 한 당시 노무현 정부의 최종 결정은 표결 2시간 전에야 이뤄졌다고 당시 우리 정부 관계자가 미국 측에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19일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에 따르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북한인권 결의 문제 등과 관련해 그해 12월 5일 본국에 ‘유엔총회 후속 조치를 함(demarche delivered)’이라는 제목의 외교전문을 보냈다.
유엔총회 산하 제3위원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 표결(한국시간 2007년 11월 21일)이 이뤄진 며칠 후인 같은 해 12월 4일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정무 담당관이 외교통상부 인권사회과의 실무자 2명을 면담한 내용이다.
전문에 따르면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북한인권 결의안에 기권하기로 한 한국의 최종 결정은 표결 2시간 전에야 내려졌다고 미측에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권 결정이 외교통상부와 다른 정부 부처들 간의 ‘고통스러운 논의’ 끝에야 나온 것이라고도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은 다른 부처들의 반대 속에서 외교통상부는 찬성 입장으로 송민순 당시 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힘겹게 싸웠다는 보도를 이 관계자가 넌지시 언급했다고도 전했다.
특히 ‘표결 2시간 전’에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는 외교통상부 관계자의 언급은 최종 결정이 2007년 11월16일 회의에서 이미 결정됐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당시 비서실장) 측 참여정부 인사들의 증언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11월 18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 주재하에 열린 회의에서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하자는 자신과 기권을 지지하는 다른 참석자들 사이에 논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 의견을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이 김 원장의 견해를 수용해 남북 경로를 통해 북한 입장을 확인해보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다만, 버시바우 대사가 작성한 전문에는 한국이 표결 이전에 미국에 기권 방침을 전달했는지와 관련한 정황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2007년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서 ‘3자 또는 4자’로 표기돼 논란을 일으킨 종전선언의 당사자 문제와 관련,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2007년 10월 4일과 5일자 주한미국대사관발 외교전문에 의하면 미국은 ‘3∼4자’ 언급을 노무현 대통령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0월 4일자 전문은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조병제는 ‘3자 또는 4자’가 중국을 군사 논의에서 배제하려는 북한의 노력을 반영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10월 5일자 전문은 “조병제 국장은 ‘3자 또는 4자 정상’이라는 문구는 노무현이 제안했다고 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면서 “조 국장은 나중에 미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3자 또는 3자’란 문구가 노무현의 구상이라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고 소개했다.
이 전문은 또 “다른 외교통상부 국장은 ‘3자 또는 4자’란 문구가 노무현의 제안이라고 정무 공사 참사관에게 말했다”고 전하고 “대사관은 이 대목에서 실제 노무현이 ‘3자 또는 4자’란 문구를 먼저 제기했다고 믿고 있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는 ‘3자 또는 4자’가 북한의 요구였다고 발표했다.
또 공개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도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전쟁에 관련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 데서 분계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라며 ‘3자 또는 4자’를 거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남북정상회담 문안 조정 당시 평양 현지팀과의 교신을 관리하던 문재인 당시 실장에게 ‘종전선언’ 앞에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의 진전’을 강조하는 표현을 넣고, 종전선언 주체와 관련해 ‘3자 또는 4자’ 대신 ‘관련 당사자’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