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文대통령이 자본시장에 줄 수 있는 선물
by박수익 기자
2017.05.10 17:03:23
| 문재인 대통령 당선인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시민들과 함께하는 개표방송에서 시민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이데일리 노진환 기자] |
|
[이데일리 박수익 기자] 17대 대통령 선거일을 닷새 앞둔 2007년 12월 14일,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여의도 대우증권 본사 영업부를 방문해 이렇게 얘기했다. “실물경제를 한 사람으로 허황되고 정치적인 이야기는 안한다. 지도자를 신뢰하고 국민이 화합한다면 내년(2008년)에는 코스피지수가 3000을 돌파할 것이고 제대로만 경제가 된다면 임기내(2012년 2월)에 5000까지 가는 게 정상이다. 정권이 바뀌면 주식하는 사람이 행복해질 것이다.”
지지율 1위를 달리던 유력후보의 자신감. 그런데 과연 주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해졌을까. 대선 1년 뒤 코스피지수는 거침없이 내려앉으며 발언 당시(1895.05)보다 770포인트 하락, 1000을 겨우 유지했다. 정치적 얘기 안한다면서 ‘지도자를 신뢰하고 국민이 화합하면’이란 조건을 걸며 코스피지수가 오를 것이란 정치적 얘기를 꺼냈던 이 전 대통령. 그의 임기동안 코스피는 3000선 가까이에 가보지도 못했다. 이전 대통령과 1993.09(18대 대선일 기준)로 바통 터치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4년여 임기동안 코스피는 박스피(일정한 폭 안에서 오르내리는 현상)를 거듭했고 2097.35(헌법재판소 탄핵 인용결정 당일)로 물러났다.
오히려 그가 탄핵당한 이후 조기대선이 본격화하면서 코스피는 꿈틀대기 시작했고, 대선을 닷새남긴 지난 4일 역사적 고점을 뚫었다. 대선 전날 지난 9일에는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더 높게 치솟으며 2292.76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9일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다. 대선 직전 치솟은 코스피지수를 설명할 때 새정부 기대감에 ‘베팅’한 투자심리를 제외하고 설명할 길은 없다. 그러나 기대가 단지 기대수준으로만 그친다면 딱 거기까지. 부양책이 실효성 없음이 확인되면 주가는 과거에 그러했듯 실패한 공중부양 마냥 주저앉을 것이다.
주가지수 같은 건정부의 역할 밖이다. 정부가 해줘야할 역할은 따로 있다. 시장의 원칙과 상식을 세우고 그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집에 자본시장 관련 이슈는 아주 눈 크게 뜨지 않으면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비중만 차지한다. 국가 사회적 현안이 많은 자리에 자본시장이 끼어들 틈이 많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문 대통령의 공약집 한 켠에서 발견한 몇 가지를 짚어본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연금을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고 주주권 행사 강화로 건전한 시장질서를 확립하겠다고 밝혔다. 대선 전날인 8일 비상경제대책단 회의를 통해서도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실효성 있게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국민연금과 보험·자산운용사 등 주식을 많이 보유한 기관투자자들이 투자결정 과정과 결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일관된 원칙에 입각해 행동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국민(고객) 돈 받아서 굴리는 집사(스튜어드)들은 오직 국민(고객) 눈치만 보고 책임껏 투자를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튜어드십코드는 이미 2년 전부터 논의가 본격화해 작년 말 이미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 차려진 밥상이 외면 받은 이유는 고객 돈으로 배부른 기관투자자들이 단식투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튜어드십코드를 시행하래도 꿈쩍 않던 국민연금은 대선이 임박하자 슬그머니 용역 입찰을 통해 ‘뭔가 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전형적인 코드 맞추기이다.
문 대통령과 그의 경제참모들이 스튜어드십코드를 실효성 있게 시행하고 사회책임투자를 확립하겠단 약속을 지키려면 그동안 무슨 이유로 국민연금이 여태껏 뜸들이다가 이제야 코드 맞추기에 나서는지, 또 그렇게 만든 국민연금 내부 인사시스템의 문제는 무엇인지부터 찾아내 그 적폐부터 청산해야한다. 그러지 않고선 정권 바뀔 때마다 코드 맞추려는 인사들의 생명력만 연장하는 꼴이 된다. 그런 적폐를 청산하고 시장이 존중하는 개혁적 인사를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해야한다.
국민이 노후자산으로 맡긴 56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총수일가의 불법·편법적인 지배와 상속, 다수의 소액주주 권익을 침해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연금 ‘사회주의’가 아니라 연금의 ‘사회적 책임’이다. 이를 연금사회주의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국민연금 재정고갈을 지적할 자격도 없다. 자본시장을 바로 세우려면 기관투자자의 맏형인 국민연금부터 제대로 개혁하면 된다. 그러면 기관투자자들은 따라간다. 이런 개혁 없이 무작정 연금을 독립시키면 연금사회주의보다 더한 연금괴물이 된다. 그것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다. 그 다음엔 연금 스스로의 절차와 원칙에 맡기도록 하면 된다.
문 대통령은 자본시장 교란행위 처벌 강화의 일환으로 지정감사제 확대 등 기업회계규율을 정비하고 분식회계 등 불법 부당회계를 방지하겠다고 밝혔다. 지정감사제 확대 같은 구체적 정책 사안은 경제 관료에 맡기면 된다. 지금도 뜻있는 관료들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대통령이 만들어야할 원칙은 따로 있다. 역대 정부마다 반복돼 온 보은(報恩)성 낙하산인사를 감사로 내리꽂지 않는 것이다. 감사(監査)가 무엇인가. 기업 회계의 1차 게이트키퍼이자 내부통제의 최전선에 있어야할 사람들이다. 정부 실세에 한 자락 줄을 댔다는 이유로 회계장부도 볼 줄 모르면서, 법인카드 한 장 들고 외부민원창구 노릇하며 밥 먹으러 다니는 인사들을 내려보낼 요량이면 기업회계규율 정비한다는 얘기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한다.
감사만 문제가 아니다. 산업은행을 필두로 기업은행, 예금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한국거래소 코스콤 증권금융 예탁결제원 등은 낙하산 천국이다. 구조조정 역할이 막대한 금융공기업과 자본시장의 중추 인프라에 낙하산 부대가 내려앉아 있는데 무슨 규율을 세우고 원칙을 말할 수 있나. 이제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공공기관 임원인사에 대선 공신들을 배려해달라는 식의 얘기를 꺼낸다면 그런 사람이 곧 문 대통령이 청산대상으로 강조해왔던 적폐다. 금융분야에 국한하지 않는다. KT 포스코 같은 민영화한 공기업엔 정부 지분이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정권 교체기에 낙하산 인사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KT 포스코 같은 기업은 우리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중추기업이고 국내 자본시장에서도 비중 높은 상장사이다. 이런 회사가 철마다 정치적 바람에 흔들리니 건전한 외국투자자들 시선에선 한국 자본시장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새 정부는 공기업이나 민영화된 공기업부터 전문성 없는 보은성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내부감사든 사외이사든 CEO든 정권의 전리품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비단 자본시장에 국한한 원칙이 아닌 사회전반의 공정한 원칙이기도 하다. 공기업을 전리품 취급하고 이미 공기업에서 독립한 기업의 지배구조는 시궁창으로 만들면서 민간기업의 투명한 지배구조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 노력부터 있어야 새 정부가 강조하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설득력을 얻고 기업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이 정도만 해도 새 정부는 자본시장에 할 일을 하는 정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