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던져진 1000억 청구서”…산업은행, 홈플러스 요구에 ‘당혹’
by최정훈 기자
2026.01.21 16:42:56
홈플러스, 산은 1000억 대출 기정사실화…사전 협의 전무
채권단도 아닌 국책은행 호출에 “절차적으로도 이례적”
정책금융 역할·책임소재 논란까지 불거져
[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홈플러스가 유동성 위기 극복을 위해 산업은행에 1000억원 규모의 긴급운영자금대출(DIP) 참여를 요청하자, 산업은행 내부에서는 당혹감이 적지 않은 분위기다. 사전 협의나 공식·비공식 접촉 없이 회생계획안과 입장문을 통해 산은의 대출 참여가 기정사실처럼 언급됐기 때문이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홈플러스는 전날 입장문을 통해 유동성 위기가 심화된 상황이라며 산업은행과 메리츠금융그룹에 각각 1000억원씩, 총 3000억원 규모의 DIP 대출 참여를 요청했다. 대주주인 MBK파트너스가 이미 1000억원 참여 의사를 밝힌 만큼, 나머지 자금을 국책금융과 민간 금융사가 분담해달라는 구조다.
하지만 정작 산업은행은 홈플러스 측으로부터 해당 요청과 관련해 사전에 어떤 공식·비공식 문의도 받은 바 없다는 입장이다. 산은 관계자는 “회생계획이나 DIP와 관련해 홈플러스 측의 사전 접촉은 전혀 없었다”며 “입장문을 보고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산은 내부에서는 “사전 논의도 없이 1000억원을 전제로 한 계획이 공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메리츠금융은 홈플러스의 채권단 중 최대 채권자이지만, 산은은 홈플러스의 채권단이 아니어서, 내부의 당혹감은 더 큰 상황이다. 채권 관계가 없는 국책은행을 회생계획안에 갑작스럽게 포함시키는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평가다. 금융권 관계자는 “통상 DIP 대출은 기존 채권자나 주채권은행을 중심으로 논의된다”며 “계획서 제출 전에 최소한의 타진이나 의견 교환이 있었어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홈플러스가 사전 협의를 시도할 경우 산은으로부터 반려될 가능성을 우려해, 계획안에 먼저 이름을 올렸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요청이 공식적으로 접수된다 하더라도 대출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회생 가능성과 자금 회수 구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은이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정책금융 부담을 둘러싼 고민도 깊다. 정부가 홈플러스 회생에 협조적인 기조를 보일 경우 산은이 ‘마지못해’ 지원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경우 지원 결정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는 점 역시 부담 요인이다. 금융권에서는 “막연한 회생계획을 근거로 1000억원을 집행할 경우, 향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금융위원회 등 정부, 산은 중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메리츠금융그룹 역시 현재까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금융권에서는 “민간 금융사 역시 회생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1000억원을 부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홈플러스의 DIP 대출 요청을 둘러싼 논의가 단순한 개별 기업 지원을 넘어, 정책금융의 역할과 한계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주주의 책임과 회생계획의 실효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책은행을 전면에 세운 접근 방식이 적절했는지를 두고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산은이 반도체·배터리·방산 등 이른바 생산적 금융과 국가기간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통업체인 홈플러스까지 지원 범위를 넓히는 것이 타당하냐는 문제 제기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산은 내부에서는 ‘생산적 금융에 투입해야 할 자금이 산적한 상황에서 유통기업의 운영자금까지 감당할 여력이 있느냐’는 문제의식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