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만 되면 가슴이 무너져" 세월호 곁 지키는 유가족들

by김정현 기자
2017.04.20 18:36:13

전달 31일 내려와 조별로 항구주변서 천막생활
매일 10시·15시 세월호 근접참관…"하루 중 가장 힘들어"
여전히 3년 전 참사의 시간을 사는 유가족
“그래도 세월호가 세상 바꾼 것에서 의미 찾는다”

20일 오전 10시 세월호 유가족들이 세월호 선체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전남 목포신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글·사진 목포=이데일리 김정현 기자] 20일 전남 목포 목포신항 주변은 한산했다. 지난 16일 세월호 3주기 때 북적이던 인파는 온데간데 없다. 목포신항의 넓은 부두에는 붉게 녹슬고 뒤틀린 세월호 선체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곁을 자식 잃은 부모 지키고 있다.

유가족이 머무는 목포신항 주변 임시천막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의 식당은 는 100석이 넘는 좌석이 있지만 실제 사람이 앉은 곳은 네 곳 뿐이다. 유가족들은 말없이 식사했다. 텔레비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식당 주인은 “아침에는 입맛이 없는지 몇 명 오지 않는다”며 “점심에는 다 같이 와서 식사를 한다”고 말했다.

아침식사 이후 유가족들은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각각 한 시간씩 세월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단원고 2학년 5반 준영군 아버지 오홍진(55)씨는 “10시에 세월호를 가까이에서 참관할 때가 하루 중 가장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0시가 아이들 목숨이 끊어지기 시작한 때다. 10시 10분엔 뭘 했는지 11분엔 어땠는지 아직도 분 단위로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아이가 죽어간 배를 보는 것이다”고 했다.

오전 11시 유가족들은 세월호를 뒤로 하고 천막으로 돌아와 삼삼오오 모여 노란 추모리본을 만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항상 세월호가 침몰한 그날이다. 오씨는 “수학여행 전날 가방 싸준 얘기. 참사 났을 때 보도가 어떻게 잘못됐다는 얘기만 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화하다가 울음이 터지는 것도 일상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기 힘들어 한다고 했다.

눈물 뿐 아니라 농담도 유가족끼리만의 것이 있다.

단원고 2학년 10반 유민양 아버지 김영오(48)씨에게 한 유가족이 웃으면서 “나도 소외된 사람인데 왜 취재 안 해. 지금 아들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씨는 “여기 자식 있는 사람이 어딨어”라며 맞받아쳤다. 김씨는 현재 tbs 프로그램 ‘가슴에 담아 온 작은 목소리’에서 소외된 사람을 인터뷰하고 있다. 김씨는 기자에게 “이런 농담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술 한 잔 먹어도 얘기 못해요”라고 말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유가족 10여 명이 오후 3시에 세월호를 다시 찾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배이지만 또다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곳의 하루는 일찍 저문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오후 8~9시만 되어도 천막 덮개가 내려진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를 지킬 때 그러했듯 유가족들은 조를 짜서 목포신항 천막을 비우는 일이 없도록 한다.

한 조는 12~13명 정도다. 한 유가족은 “안산에서 목포를 오가는 유가족 버스가 월요일과 목요일에 각각 한 번씩 있다. 유가족들의 네이버 밴드(폐쇄형 SNS)가 있는데 거기에서 한 반에 몇 명씩 당번을 정해서 내려온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에 도착한 지난달 31일 이곳에 와 21일째 천막에서 머무르고 있다.

장훈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장은 “세월호 참사가 사회 분위기를 바꿨다. 우리는 항상 지는 싸움만 했는데 그 싸움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걸로 조금씩 위안을 삼는다”고 말했다. 김영오씨는 “사람들에게 노란리본을 나눠주고 다닌다. 이건 세월호 리본이 아니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자는 의미로 차고 다니는 생명존중리본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20일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신항 주변에 설치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천막에 노란 추모리본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놓여 있다. 유가족들은 이곳에서 주로 리본을 만드는 소일거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