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 텔레그램서 발생했는데 국내기업 규제가 웬말?"

by한광범 기자
2020.04.28 20:20:37

인터넷기업협회 주관 토론회서 법안 성토 쏟아져
"발상 자체 경악"·"텔레그램 실효성도 없어" 비판
"정부가 나서야 할일…왜 민간에 책임 떠넘기나"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n번방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서 인터넷사업자에게 성범죄 영상에 대한 기술적 차단 조치 의무를 부과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엉뚱한 진단”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민간에 떠넘기려고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28일 서울 역삼동 한국인터넷기업협회 주관으로 열린 ‘n번방 방지법, 재발방지 가능한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기술로 성범죄 영상을 차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성호 인기협 사무총장은 정치권에서 인터넷 사업자에 대한 기술적 조치 의무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는 것에 대해 “발상 자체가 경악스럽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텔레그램은 서버와 소재지가 불분명하다. 이 해외기업을 잡기 위해 국내 사업자에 대한 정밀하지 못한 규제를 신설하면, 결국 국내 기업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된다”며 “만약 국내 업체에 기술적 조치를 강요하면 이용자들이 전부 해외 서비스로 옮겨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28일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개최한 n번방 방지법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이어 “국내 주요 업체들은 이미 피해자 신고시 24시간 내 삭제조치를 다 하고 있다. 일부 그런 조치를 하지 않는 소수에 대해선 일괄 규제가 아닌 수사가 답이다”고 밝혔다. 그는 “사업자가 인터넷에 있는 수십억 개의 화면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서버에 있는 디지털 정보를 사업자도 알 수 없다”며 “전시관을 가진 기업이 왜 못 찾냐는 식의 접근은 오해다. 전면적 서칭이나 필터링은 어렵다”고 강조했다.

현실적으로 인터넷사업자가 자체적으로 ‘불법 정보’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최민식 경희대 교수는 “현행 법에선 불법 정보 판단은 행정기관이나 사법기관이 하도록 돼 있다”며 “명백한 경우가 아닌 경계상에 있는 정보의 가치 판단을 사업자가 함부로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의무를 부과할 땐 가능한 의무를 부과해야 하는데, 법안들은 불가능한 의무를 부과했다. 사실상 사업자에게 이용자들을 검열하라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진근 강원대 교수는 “일부 법률엔 ISP(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게도 책임을 부과했다. 움직이는 정보에 대한 필터링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검열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협조를 하지 않고 있는 텔레그램에 포인트를 맞춰야지, 거대한 만리장성을 쌓아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정부 차원의 제대로 된 역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상직 변호사(태평양)는 “텔레그램 문제도 러시아와의 협력으로 막아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문제 된 부분만 효과적으로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민호 교수도 “미국에서도 필터링은 정부 기관이 직접 한다. 민간 영역은 피해자를 지원하고 정부와 협력하는 역할”이라고 전했다.

김가연 변호사(오픈넷)는 “매일 같이 새로 쏟아지는 새로운 영상은 데이터베이스(DB)가 있어야 필터링이 가능하다. 결국은 국가기관에서 관련 DB를 만들어줘야 사업자들은 필터링을 할 수 있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에 예산을 쏟아부어 불법 촬영물 전담팀을 키우는 식으로 국가가 잘 대응해야 한다. 국가가 자기 할 일을 사적 영역에 떠넘기는 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보다 적극적 수사가 마련되도록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단 지적도 나왔다. 검사 출신인 구태언 변호사(린)는 “과속카메라 앞에선 과속이 발생하지 않듯이, 검거가 확실해지면 범죄율이 낮아진다”며 “성착위 범죄에 대해선 감청을 허용해 기지국 단위에서 보다 쉽게 수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