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병이라도 남·녀 증상 달라…인구문제, 성별 격차 고려해야"
by이지은 기자
2025.03.05 17:22:52
■인터뷰-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성차의학연구소장
女 가슴통증 없어도 심근경색…男 골다공증 예후 나빠
초고령사회 의료·돌봄 수요 대응…소아중환자 연구도
2021년 개정법 유명무실…"연구·임상 등 인센티브 줘야"
[성남=이데일리 이지은 기자] “남녀는 각 질환의 증상이나 치료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각각 성호르몬이나 유전적 성향이 질병에 영향을 주거나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여건이 질병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차의학은 편향성을 지양하는 의학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남녀 모두의 건강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취지에서 발전한 학문이다.”
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성차의학연구소장(소화기내과 교수)은 5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아직도 성차의학이 여성운동이나 성소수자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냐는 오해가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평균적으로 효과가 좋은 치료법을 모든 환자에게 동일하게 적용하는 게 아닌 환자 개인의 특성을 고려해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밀의료’의 한 축으로 성차의학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 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성차의학연구소장(소화기내과 교수). (사진=방인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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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소장은 남녀의 증상이 달리 발현되는 대표적인 질환으로 심근경색을 소개하며 1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가슴이 답답하고 약간 쓰린 것 같다는 60대 여성 환자의 얘기에 역류성식도질환을 생각하고 내시경을 진행했으나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다른 징후를 찾아보기 위해 식도내압검사를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환자가 갑자기 심근경색의 주요 증상인 가슴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행한 심전도 검사에서 급성 심근경색 소견이 나오면서 환자는 급히 응급실로 보내져 제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김 소장은 “심근경색의 경우 남성에게는 가슴 통증이 주로 나타나지만 여성에게는 가슴쓰림이나 답답함이 더 자주 발생한다”며 “과거엔 심근경색에 주로 걸리는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슴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경험했기에 그런 증상이 있을 때만 심근경색이라고 생각해 가슴쓰림이나 답답함 때문에 병원을 방문한 여성들이 잘못된 진단을 받고 치료가 늦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돌이켰다.
반대로 골다공증은 여성이 많이 걸린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남성들이 흔히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는 질병이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70대 이상 남성의 18%가 골다공증을 갖고 있으나 실제 치료를 받는 사람은 이 중에서도 16.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소장은 “여성 골다공증이 폐경 후 노화나 호르몬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과 달리 남성은 생활습관이나 영양상태, 다양한 질환과 약물에 관련한 ‘이차성 골다공증’인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생물학적·사회적 차이 때문에 남성은 여성에 비해 골다공증 질환 인지율이 낮고, 골절이 발생해야만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아 예후도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 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성차의학연구소장(소화기내과 교수). (사진=방인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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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을 넘어서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가운데, 올해 보건복지부의 노인복지 예산은 전년 대비 7.2% 증가한 27조 5000억원으로, 전체 사회복지 예산의 25% 수준까지 늘어났다. 사회보장위원회의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령·유족정책 관련 공공사회복지지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은 2024년 4.7%에서 2065년 11.9%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성차의학의 발전은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의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게 김 소장의 생각이다. 결국 노화와 함께 질병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은 만큼 성별 맞춤형 진단과 치료가 가능해지면 고령화 속도와 맞물려 급증하는 의료·돌봄 수요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치매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2배 이상 더 발생하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의학계에서는 이를 환경적 영향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김 소장은 “여성 유병률이 더 높은 치매의 특성을 고려해 여성 치매 연구에 60억달러를 투자하면 향후 예상되는 사회경제적 파급효과가 240억달러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성차의학은 결국 환자를 더 잘 치료하기 위해 등장했고 건강수명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출생 기조 속 소아중환자실에서 남아의 사망률이 높은 이유 등 미지의 영역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도 짚었다. 김 소장은 “자폐는 남아의 유병률이 여아에 비해 약 4배 높다고 알려졌는데 최근 연구 결과 모체의 면역세포에 의해 생산되는 염증 유도물질(IL-17)이 뇌에 미치는 영향 차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며 “일단 태어난 아이들을 잘 길러야 한다는 점에서 이런 부분들도 주목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유럽 등과 비교하면 한국의 성차의학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2021년 3월 연구개발에 있어서 성별 특성을 반영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의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으나, 실제 연구개발(R&D) 현장에서의 적용 여부는 연구자 자율에 맡겨지기 때문에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3년 국내 최초로 병원 내 성차의학연구소를 설립한 김 소장이 올해 1월 대한성차의과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학회는 의학·간호학·약학뿐만 아니라 생명공학·물리·식품영양 등 과학 분야 전문가까지 포괄하며 융합학문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김 소장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처럼 연구주제를 선정하거나 임상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양성평등을 고려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연구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보다 강제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며 “줄기세포, 인공지능(AI) 등을 미래 먹거리로 보고 정부 차원에서 집중적으로 투자했듯 성차의과학에도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