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확전·핵위협 등 ‘폭탄발언’ 없었다, 왜?

by방성훈 기자
2022.05.10 17:18:11

책임전가·민심안정에 초점…다양한 추측·해석 난무
“성과없어 승리선언 못해" "경제고통 국민불만 우려"
장기전·확전 가능성 등 전쟁 불확실성은 더 커져
바이든, 전승일 맞춰 보란듯 우크라 무기대여법 서명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일(전승일) 연설에서 서방까지 포함한 전쟁 확대 선언이나 군사작전 임무 완수 선언, 핵공격 위협 등 ‘폭탄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서방 언론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러시아 사상자 수와 경제적 고통이 증가함에 따라 민심을 추스르는데 좀 더 집중했다는 진단이다. 다만 그동안 푸틴 대통령의 거친 언사들로 미뤄볼 때 전쟁 장기화 등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 (사진=AFP)


푸틴 대통령은 이날 11분간 진행한 전승일 연설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새로운 모멘텀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우’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전쟁 책임을 미국 등 서방에 돌리고 우크라이나 침공을 합리화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앞서 서방 정보당국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 전쟁 규모를 두 배 수준으로 키우거나 승리를 선언할 것으로 관측했지만 예상을 빗겨간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연설에 대해 “핵공격 위협 등 지난 두 달여간의 격렬한 수사와 비교해 매우 차분했다. 그가 이날 발표한 유일한 정책은 전사자 가족들을 지원하는 추가법령에 서명한 것, 즉 전쟁에 따른 국민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열병식 규모도 과거에 비해 대폭 축소됐다. 이날 행사에 동원된 병력은 약 1만명으로 작년(1만 2000명)보다 적었다. 전투 차량 역시 지난해 191대에서 130대로 줄었다. 최근 시험발사에 성공한 신형 대륙간탄토미사일(ICBM) ‘사르맛’도 등장하지 않았다.

예상을 빗나간 연설 내용 및 행사 규모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온다. 우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푸틴 대통령이 축하해야 할 승리가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이미 2개월 넘게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어떤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승리 선언도 전쟁 선포도 할 수 없었다”고 꼬집었다.



NYT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가 겉보기와 달리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 국민이 전쟁으로 적지 않은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만큼, 푸틴 대통령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쟁 전 71%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후 83%로 치솟았지만, 지난달 조사에선 러시아인의 39%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전혀 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 2011년까지 푸틴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정치학자 글렙 파블로프스키는 NYT에 “러시아인들은 TV 앞에서는 전쟁을 지지할 준비가 돼 있지만, 전쟁터에 (직접) 나가 싸울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다”면서 “푸틴 대통령도 이를 인지하고 있으며 손대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인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개최된 열병식.(사진=AFP)


전쟁 향방을 가늠할 구체적 언급이 없었다는 점은 오히려 장기전 등 전쟁 불확실성을 키웠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돈바스’는 여섯 차례나 언급했다. 이 지역에서 공략 강도를 높일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닉 로버트슨 CNN방송 국제·외교전문 기자는 “푸틴 대통령이 전쟁 지역을 우크라이나 전체가 아닌 돈바스로 한정했다. 이는 러시아가 전선에서 물러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실제 이날 연설 이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남부 요충지 오데사에 순항미사일 4발을 퍼부었다.

서방 등과의 확전 가능성 역시 열려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 정치분석업체 R.폴리틱의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컨설턴트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병력 부족이 아닌, 서방의 무기 지원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며 “그는 서방이 후퇴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는 모두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공격이라는) 방식”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미국은 전승일에 맞춰 우크라이나 지원 확대로 응수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 무기 대여법안’(S.3522)에 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영국 등 동맹국들을 지원했던 법률을 토대로 작성된 법안으로, 우크라이나에 무기나 보급품 등을 더 쉽게 보낼 수 있도록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DC 모금행사에 참석해 “푸틴 대통령이 지금 당장 (전쟁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서 걱정된다. 우리가 해결책을 찾아보려 한다”며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방어 무기 대여법안’(S.3522)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A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