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SRE][COVER]회사채시장 양극화 '그늘'…기관 안전주의 탓
by유재희 기자
2018.05.16 13:47:57
덩치는 커졌지만 우량등급 대기업 중심의 쏠림화
[이데일리 유재희 기자] 회사채 시장 선진화, 비우량등급(고수익) 채권 거래 활성화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회사채 시장은 기업의 장기적인 자금조달원으로서의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시장의 활성화 및 안정성 여부에 따라 기업과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회사채 시장은 몇 차례의 신용위기를 거치면서 ‘A’ 등급 이상은 투자등급으로 그 이하는 하이일드(고위험·고수익)채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자본시장 내 기관화 현상이 심화하면서 기관이 투자하지 않는 종목은 모두 하이일드채권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가 해소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발전은 물론 경제 활성화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당국과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회사채 시장 활성화 방안을 서둘러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채는 기업 자금조달의 매우 중요한 원천이다. 기업이 영업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내부자금으로 조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대출이나 회사채·주식 발행 등 외부자금을 통해 조달하는데, 특히 회사채가 핵심적인 기업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규모 자금을 장기간 조달할 수 있고, 주식 발행과 비교해 경영권의 안정적인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 연초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7년 기업의 직접금융 조달실적’ 자료를 보면 공모를 통한 기업의 회사채 발행실적은 144조 238억원으로 전년도 109조 8579억원과 비교해 34조 1659억원(31.1%) 증가했다. 무보증 일반회사채 발행 규모는 32조 1468억원으로 전년 24조 3516억원 대비 7조 7952억원(32%) 늘어났다. 이는 미국의 금리 인상 본격화를 앞두고 선제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특히 A등급 이상 회사채와 금융채 발행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반면 주식을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10조 3572억원으로 전년도 10조 2575억원 대비 997억원(1%) 증가에 그쳤다.
이처럼 국내 회사채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크게 도약했지만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최근 몇 년간 일부 대기업에서 발생한 신용경색 및 도산위험이 회사채 투자심리를 위축시킨 결과로 해석된다.
2017년 발행된 무보증 일반회사채 중 AA등급 이상이 22조 5050억원으로 전체에서 70%를 차지했고 A등급이 8조 530억원으로 25.1%를 기록했다. 반면 BBB등급 이하 발행규모는 1조 5888억원으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9%에 불과했다. 지난 2001년 A급 이상 회사채와 BBB급 비중이 각각 55.6%, 25.4%였던 것을 고려할 때 회사채 시장이 양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지만 질적으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규모별 자금조달 구조를 보면 중소기업은 대출위주로, 대기업은 회사채발행을 중심으로 한 직접금융이 확대되는 추세다.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일수록 금융기관의 사전심사와 사후감시체계에서 자유로운 자본시장에서의 자금조달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반면 중소기업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확대 노력 및 정부의 중소기업지원강화 등의 영향으로 간접금융을 통한 자금조달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국내 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644조 1822억원으로 전월대비 3조 9901억원 증가했다.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 796조 217억원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이 81%에 달한다. 문제는 은행의 중소기업 여신 대부분이 담보대출이라는 점이다. 상환 의무가 없는 주식발행이나 신용만으로도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회사채와 비교해 기업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회사채 시장 활성화는 기업의 자금조달수단을 다양화하고 금융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제 전반으로 보더라도 장기적인 투자자금의 수요와 공급을 원활하게 해야 자본시장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다.
27회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SRE, Survey of credit Rating by Edaily)에 참여한 시장 전문가들은 국내 회사채 시장이 정체에 빠진 이유를 묻는 질문에 유효 응답자 188명 중 141명(75%)이 ‘대기업 위주의 회사채 발행 등 기초자산 부족’이라고 답했다. 현재 회사채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는 지적이다.
이어 회사채 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묻는 질문(2개 복수응답)에 101명이 ‘연기금 투자기준 완화’라고 응답했다. 현재 연기금은 대부분 ‘BBB+’급 이상의 회사채에 투자하도록 내부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AA’급 회사채에만 투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관 투자자의 회사채 투자기준 보수화에 따라 A등급 이상의 우량 기업만이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시장 구조가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외국의 연기금의 경우 수익기회 확대 전략의 일환으로 운용자산의 일정 비율을 고수익채권에 운용할 수 있는 자산배분 전략을 도입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고수익채권에 전문성이 높은 핌코나 블랙록과 같은 자산운용사가 적극적인 자산운용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는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고수익 채권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결국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관투자자들의 고수익채권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고수익채권에 전문성을 지닌 자산운용사의 육성과 다양한 고수익 채권시장상품의 개발, 회사채시장의 인프라 개선 등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설문 참여자들은 회사채 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보증채, 담보채 등 신용위험을 덜 수 있는 채권 확대’(62명)에도 많은 표를 던졌다. 저신용등급 회사채 발행규모 확대를 위해선 보증채, 담보채와 같은 신용위험을 통제하는 채권을 도입하거나 Primary CDO(부채담보부증권)의 활성화 추진 등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하이일드채권 펀드에 대한 세제 혜택 재도입(59명)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3년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비우량채를 일정비율 이상 편입한 회사채 펀드에 대해 배당소득을 분리과세하는 방안을 도입했으나 지난해 말 일몰(폐지)됐다.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세제 혜택이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다.
설문 참여자들은 이 밖에도 △IPO 기업 등급 의무화 등을 통한 기초자산 저변 확대(52명) △초대형 IB에 대한 발행어음 업무 인가(49명) 등을 회사채 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꼽았다.
한 SRE 자문위원은 “모든 상장사 또는 신규 상장(IPO) 기업의 신용도 평가를 의무화한다면 주식 투자자에게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는 회사채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질 것”이라며 “기초자산 및 등급 평가 대상의 확대는 결국 하이일드채권 활성화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회사채 시장에서의 라이징 스타(성장 유망 기업) 발굴과 은행 대출에만 쏠린 중소기업의 자금조달 구조를 회사채 시장으로 끌어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SRE 자문위원은 “국내에서도 뱅크론(금융사가 투자등급(BBB-) 이하의 기업에 자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변동금리부 선순위 담보대출 채권) 시장이 열리려면 하이일드에 등급을 매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며 “우선 IPO 기업에 등급을 매기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투자자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며 “주식 애널리스트의 평가와 신용평가사의 평가를 가지고 투자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