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핀테크 상징 와이어카드, 수조원대 분식회계로 몰락
by방성훈 기자
2020.07.07 19:26:16
獨검찰, 회계장부 조작 와이어카드 CEO·임원 체포
분식회계 의혹 사실로 드러나…19억유로 현금 증발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독일에서 가장 촉망받던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의 분식회계 사건이 전세계 금융가와 핀테크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재무제표상 회사 자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9억유로(한화 약 2조5700억원) 규모의 현금이 ‘증발’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전·현직 경영진들은 금융사기 혐의로 잇따라 체포됐고, 한때 핀테크 기업의 대표이자 금융업계의 미래로까지 일컬어지던 와이어카드는 세기의 금융사기집단으로 전락할 위기다.
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독일 검찰은 이날 와이어카드의 임원인 올리버 벨렌하우스를 분식회계 등 금융사기 혐의로 두바이에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수시간에 걸쳐 심문한 결과 도주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 구속했다는 설명이다. 벨렌하우스는 와이어카드의 자회사 카드시스템스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분식회계에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벨렌하우스에 앞서 마르쿠스 브라운 전 최고경영자(CEO)도 독일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됐으며, 그의 오른팔로 알려진 얀 마살렉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들 세 명은 회계장부 조작 등 분식회계를 주도하거나 깊숙하게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회계법인 KPMG는 지난 4월 특별감사 결과 10억유로의 현금 잔고를 증명할 서류가 없다고 발표했다. 당초 와이어카드는 이 감사를 통해 결백을 증명하려 시도했지만 정반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와이어카드는 10억유로를 싱가포르와 필리핀에 있는 은행에 보관하고 있다며 해명했지만 거짓으로 확인됐다. 이 때부터 회계부정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됐으며 지난달 18일 회계법인 어니스트앤영(EY)이 감사 결과에서 와이어카드가 보유 중이었던 현금 19억유로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분식회계가 사실로 드러났다.
분식회계 사실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18년 동안 회사를 이끌어 오던 브라운 전 CEO가 지난달 19일 사임한 뒤 체포됐고, 같은달 22일 와이어카드는 19억유로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리고는 사흘 뒤인 25일 독일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와이어카드는 파산했지만, 제휴사와의 계약과 결제시스템은 남아 있는 상태여서 고객들의 피해는 크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파산 신청 후 도이체방크는 와이어카드를 통째로 매입하거나 특정 사업부만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와이어카드는 애플페이나 페이팔처럼 인터넷·모바일·오프라인 상점 등에서 전자결제를 중개해주는 업체다. 지난 1999년 독일 뮌헨에서 금융서비스 기업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했고, 현재는 뮌헨에 본사를 두고 전세계 26개국에서 모바일·온라인 결제 및 신용카드 발급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설립 초기까지만 해도 와이어카드의 주 고객은 포르노와 도박사이트 이용자들이었지만 지난 2002년 KPMG 컨설턴트 출신 브라운 전 CEO가 회사를 이끌면서 급성장했다. 페덱스와 이케아, 싱가포르 항공 등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과 계약을 성사시켰고,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재무제표상 매출은 50배, 영업이익은 70배 폭증했다. 이후 와이어카드는 지난 2018년 독일 닥스(DAX)30지수에서 코메르츠방크를 대체했고, 작년엔 한 때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치뱅크의 시가총액을 추월해 주목 받았다.
와이어카드는 2017년 기준 3만3000개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17만개의 소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별감사에서는 와이어카드의 실질 고객군도 소규모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FT에 따르면 와이어카드는 2017년 상반기 10만7000개의 고객 명단을 제출했는데, 이 중 절반은 고객사 100곳을 중복해 기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고객 대부분은 소액 결제자였다. FT는 브라질에서 6만7000명의 거래액이 매출 900만유로로, 또다른 3만명의 거래액은 170만유로로 뻥튀기됐는데 실제로는 매출이 0유로였다고 전했다. 나머지 고객들은 포르노 사이트 이용 고객들이었다.
회사의 핵심 사업으로 매출액과 거래량의 각각 절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럽 내 결제 처리와 유럽·북미 지역 신용카드 발급 실적 역시 부풀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KPMG 감사 결과 코메르츠방크 시총을 제쳤던 2018년 이들 핵심 사업에서 7400만유로의 영업손실을 낸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와이어카드 사건 이후 EY는 지난 10년 동안 진행된 감사에서 부실한 회계장부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독일 금융당국에 대해서도 감시·감독의무 소홀, 더딘 의사결정 및 부서간 책임 떠넘기기 등 시스템적 결함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정부는 현재 둘로 나뉘어진 민간 부문 규제당국과 시장 규제당국 간 회계감독시스템을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조만간 개혁에 착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