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윤민하 기자
2021.08.05 20:00:45
비인기 종목 ‘깜짝 선전’에 대중 관심·응원↑
경기 장면 생소해도 선수들 즐기는 모습에 공감
전문가 “올림픽 본질과 가까운 종목들”
기업 전략적 투자 있어야 인기 지속 가능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남자 높이뛰기 결선이다. 메달에 연연하지 않고 환한 미소로 대회를 즐긴 우상혁 선수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김병수 씨, 26·남)
"우리나라 선수의 요트가 당당히 바람을 가르는 걸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다음 올림픽에서도 하지민 선수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김무근 씨, 27·남)
29개 종목 238명. 올림픽을 위해 도쿄 땅을 밟은 우리나라 선수단 규모다. 그동안 이들 모두에게 같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은 아니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오랜 설움을 이번 도쿄 올림픽에선 덜었다. 열기를 더해가는 2020 도쿄올림픽에서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종목들에 열띤 응원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음지에서 묵묵히 땀 흘린 선수들의 노력이 ‘깜짝 선전’에 힘입어 주목받는 모습이다.
높이뛰기·다이빙·요트·7인제 럭비...‘최초&최고’ 기록 쏟아져
실제 개막 후 소위 비인기 종목에서 연이어 낭보가 전해졌다.
지난 1일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 35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4위에 오른 우상혁(25·국군체육부대)이 대표적이다. 다이빙 우하람(23·국민체육진흥공단)도 남자 3m 스프링보드 결승에서 한국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한국 선수 최초로 올림픽 요트 ‘메달 레이스’에 진출한 하지민(32·해운대구청)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모두 각 종목에서 국내 ‘간판’으로 통하지만 비교적 인지도가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해당 스포츠 자체가 일반 국민에겐 생소해서다.
이변 끝에는 감춰져 있던 서사가 드러났다.
12개국 중 12위를 기록한 7인제 럭비 대표팀은 지난달 26일 뉴질랜드를 상대로 역사적인 올림픽 본선 첫 득점을 올렸다. 열악한 국내 럭비 저변을 딛고 일군 값진 성과라는 평가다.
배드민턴 남자 단식 세계랭킹 38위 허광희(26·삼성생명)는 이틀 뒤 랭킹 1위 모모타 겐토(일본)를 세트스코어 2-0으로 격파했으나 방송 3사 어디에서도 실시간 중계를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움과 분노를 샀다.
지난 2일 남자 기계체조 도마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새로운 '도마 황제'에 등극한 신재환(23·제천시청) 또한 허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고도 재활 끝 올림픽 무대 정상에 오른 사연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시청자 "노력 그 자체로 뭉클, 앞으로도 응원할 것"
시민들은 대중의 무관심에도 굴하지 않고 실력을 키워 올림픽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모습이 뭉클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무근(27·남)씨는 지난 1일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요트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 보는 요트 경기였지만 레이저급에 출전한 하지민 선수가 물살을 가르는 모습에 감탄해서다.
김씨는 “요트는 서구권 국가가 강세를 보이는 종목이라고 들었다"면서 "유럽 선수들 가운데 우리나라 선수가 바람을 가르며 당당히 나아가는 모습에 자연스레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병수(26·남)씨는 같은 날 남자 높이뛰기 결선을 시청한 뒤 바(bar)를 뛰어넘는 우상혁선수의 사진을 휴대전화 배경 화면으로 설정했다.
김씨는 "우리나라 선수는 신체 조건상 육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데 우상혁 선수가 환한 미소로 경기를 즐기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며 "그동안 조명이 비추지 않은 곳에서 꾸준히 흘린 땀방울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그는 "관련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배경 화면을 바꿀 정도로 푹 빠졌다"며 “다음 파리올림픽에서도 관심을 두고 응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적보다 즐기는 모습에 집중...금은동 못 따도 응원
메달 여부에 목 메던 과거와 달라진 선수들의 모습도 비인기 종목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데 한 몫을 했다.
강모(22·여)씨는 “우 선수가 자신에게 ‘레츠 고, 우!’라고 외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며 “이전 올림픽에서는 메달 획득 여부를 살폈다면 올해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모습에 감동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김무근 씨도 "최근 올림픽을 시청하는 마음가짐이 바뀌었다"며 "선수들이 후회 없이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메달 색깔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다만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웠던 중계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종목인 만큼 규칙을 익히고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실시간 중계와 해설이 필수라는 지적이다.
김모(26·여)씨는 “지상파 3사의 중계가 인지도가 높은 종목에 치우쳐 있는 느낌”이라며 “보고 싶은 종목의 경기를 방송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따로 찾는 과정이 번거로웠다”고 토로했다.
동일시·언더독 효과로 수월한 감정 이입 가능
비인기 종목에 이처럼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올림픽 무대의 특수성과 '언더독(underdog) 효과' 등 심리 현상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육상·수영 등 대중이 '비인기 종목'으로 인식하는 경기들이 순수 신체를 바탕으로 경쟁하는 올림픽의 본질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축구·농구·테니스 등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구기 종목은 사실 올림픽이 ‘메인 이벤트’가 아니다. 더 권위 있는 대회가 있기 때문"이라며 "올림픽은 프로스포츠에서 상업적 성공을 누리지 못하는 종목들이 기회를 갖는 무대"라고 설명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약자에 대한 동일시와 언더독 효과로 시청자들이 비인기 종목 경기에 감정을 더욱 수월하게 이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언더독 효과란 경쟁에서 약세에 있는 쪽을 더 응원하게 되는 심리 현상을 뜻한다.
임 교수는 "시청자들은 비인기 종목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함께 성취감을 느끼는 동일시를 경험한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단절감이 커진 상황에서 상대적 약자의 선전에 더욱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전했다.
전문가 “전략적 투자 있어야 ‘비인기 종목’서도 성과 이어갈 수 있어”
전문가는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올림픽을 계기로 삼아 추후 잠재력 있는 종목에 기업의 집중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유겸 교수는 "양궁·펜싱 등 우리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꾸준히 호성적을 내는 종목에는 그에 걸맞은 투자가 뒤따랐다"며 "단순히 '비인기 종목 지원을 늘리자'는 식으로 뭉뚱그리지 말고 세부 종목별, 종목 내 세부 분야별로 전략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기업과 국가가) 엘리트 스포츠에 투자하는 일을 사회적 자본 낭비로 바라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번 올림픽을 통해 국민이 느낀 환희를 계기로 인식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관심이 지속될 수 있도록 체험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기광 국민대 스포츠건강재활학과 교수는 “국민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판’을 마련해야 한다”며 “학창 시절 학생들이 다양한 종목을 충분히 경험해 볼 수 있도록 교육 당국에 예산을 지원하는 등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어 “어린 시절 여러 종목에 도전한 경험이 성인이 된 후 생활체육 입문으로 이어져 ‘마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냅타임 윤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