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쿠단스 현타오게 한 역대급 게임대회 사기극

by노재웅 기자
2020.08.19 17:31:30

세계 최고 상금 걸렸던 사우디 ‘철권7 초청전’
韓선수 1~3위 휩쓸었지만…1년 넘게 상금 미지급
주최·주관사 ‘묵묵부답’…운영사도 “피해자” 주장

2019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게이머즈콘 트루게이밍 인비테이셔널’ 대회 포스터. 1년6개월이 넘도록 대회에서 약속한 상금은 모두 지급되지 않은 상태다.
[이데일리 노재웅 기자] “그날을 기점으로 선수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신적 트라우마와 ‘현타’(현실자각타임)가 너무 크게 다가와서 동기부여가 전혀 생기지 않고, 대회 출전에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인기 격투게임 ‘철권7’ 세계에서 그동안 명성을 날렸던 13년 경력의 ‘쿠단스’ 손병문(34) 선수는 19일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사실상 ‘은퇴’ 수준의 충격적 발언을 전했다. 그는 2017년 세계대회 우승, 2018년 준우승을 거머쥔 손에 꼽히는 실력자다.

손 선수가 말한 ‘그날’은 지난 2019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게이머즈콘 트루게이밍 인비테이셔널’ 대회를 말한다.

대회 개최 몇 개월 전 국내 유명 철권 선수인 손병문 선수와 락스게이밍 소속 ‘무릎’ 배재민, ‘샤넬’ 강성호 선수 등은 대회 운영사인 트루게이밍으로부터 대회 초청장을 받았다.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단일 이벤트 경기에 걸린 상금만 무려 11만달러(한화 약 1억3000만원). 사우디아라비아 대표 8명과 한국 선수 3명을 포함한 해외 대표 8명 등 총 16명이 경쟁해 우승자는 6만달러(약 7100만원)를 챙길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전까지 열렸던 철권7 대회의 우승자 상금 규모가 최대 1500만원 수준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먼 이국땅에서 열리는 낯선 대회지만 구미가 제법 당길 만한 규모였다.

업계에선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소라(Sora)’ 선수가 지난 2018년 11월 열린 ‘제10회 e스포츠 월드 챔피언십)’ 철권 종목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금메달을 안긴 것을 사우디 왕자 중 한 명이 감명 깊게 보고, 세계 최고 규모의 철권 대회를 후원했다는 설도 돌았다. 손병문 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역대급 상금 규모였다. 비자를 받는 과정도 까다로웠고, 개인 준비비용도 발생했지만 감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최 측에서 숙박과 교통비, 체류비용 일체를 지원해줬기 때문에 대회 현장에 가서도 불편함은 없었다”고 말했다.

락스게이밍 관계자 역시 “중동에서 열리는 e스포츠 대회라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다 대회 운영이 원활하고 깔끔하게 진행돼 놀랐다. 관중도 정말 많이 찾아왔고, 대회 자체의 완성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전했다.

대회 결과 한국 선수 3명이 나란히 1~3위를 휩쓸었다. 손병문이 우승하며 6만달러, 준우승한 강성호가 2만5000달러, 3위 배재민이 1만달러의 상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회 측에서 약속했던 상금은 바로 지급되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뿐만 아니라 7위 안으로 입상한 현지 선수들도 상금을 받지 못한 사정은 똑같은 것으로 전해졌다.



손병문과 락스게이밍은 곧장 대회 운영사인 트루게이밍에 상금 지급 관련 문의를 했고, “통상 1년 정도 늦어질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실제로 중동에서 열리는 다른 많은 e스포츠 대회들도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내에 상금이 지급되는 관례를 확인한 국내 선수들은 안심한 채 트루게이밍의 답변을 믿고 기다렸다.

트루게이밍이 말한 1년도 어느덧 지나 올해 3월이 됐을 무렵, 락스게이밍은 재차 트루게이밍에 상금 미지급 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

이번엔 대답이 달라졌다. 트루게이밍 측은 “주최, 주관사인 제네럴 엔터테인먼트 오소리티(GEA)와 카얄에 문의하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더불어 “우리도 대회 운영비를 받지 못했다”며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락스게이밍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주관사인 GEA는 사우디 정부단체다. 그렇기 때문에 ‘설마 GEA가 뒤통수를 칠까’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GEA는 락스게이밍의 메일을 읽지도 않고 있으며, 연락 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카얄은 메일은 열어서 확인하지만, 회신이 없는 상태다.

운영사와 주최, 주관사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연락조차 닿지 않으니, 멀리 사우디까지 날아가 대회 흥행을 위해 선전한 한국 스타 선수들만 갑갑한 노릇이 됐다.

손병문 선수는 소속 회사가 없기 때문에 락스게이밍이 손 선수까지 챙겨서 이번 사안의 해결 방법을 백방으로 찾고 있다. 락스게이밍은 우선 사우디 e스포츠 연맹인 SAFEIS에 공식 문의를 했다. SAFEIS는 “상금 미지급 문제가 해결되지 전까지 GEA, 카얄, 트루게이밍이 대회를 열지 못하도록 승인을 막겠다”고 답할 뿐 직접적인 중재역할까지는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한국e스포츠협회(KeSPA)를 통해서도 SAFEIS에 마찬가지의 문의를 전달했지만, 같은 답변이 왔을 뿐이다. 아무래도 GEA도 정부단체다 보니 쉽게 관여하기가 어렵지 않겠냐는 게 협회나 락스게이밍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락스게이밍 관계자는 “결국은 GEA와 카얄, 트루게이밍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방법이 최후의 수단이 되겠지만, 국제 소송이라는 게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할애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다”며 “아마도 소송은 고려 대상에 오르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무역협회나 사우디 정부단체에 연결된 변호사를 통해서 (문제 해결 방법을) 알아봐 줄 수 있는지 추가로 문의해보는 정도가 최선이지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손병문 선수는 “락스게이밍이 알아봐 주고 있지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반 포기상태”라며 “e스포츠 대회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사기극에 휘말리게 된 점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라고 심경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