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판매에 직원할당까지'…과당경쟁 늪에 빠진 ISA

by김경민 기자
2016.02.24 17:39:39

직원당 수백계좌 유치 할당 지시
실명제 위반 감수 유치전 펼쳐
구체적 상품 설명 없고
고가 경품 이벤트만 강조
당국 "실태 파악 후 집중 단속"

[이데일리 김경민 성선화 기자] “현재 구체적으로 ISA에 담길 상품이나 수수료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24일 서울 중구 명동의 A은행 창구. 대기표를 뽑고 기다린지 30여분이 지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가입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골드바를 경품으로 내건 이 은행 창구 직원은 “ISA는 예금과 펀드에 투자하는 것”이라며 “구체적인 상품은 다음 달 14일 본격적인 시작이 돼야 가입자가 상담을 통해 안내를 받고 고를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 등 대부분의 금융사 창구에서는 투자 위험에 대한 안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유치안내만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올해 금융권 ‘돈의 전쟁’의 시발점이 될 ISA 도입을 앞두고 은행과 증권사들의 과당경쟁이 불붙으면서 불완전판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금융권의 사전 유치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 금융사들은 값비싼 경품 등을 내걸고 고객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은행의 경우 직원당 할당량을 강제 배분하는 사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ISA 출시에 맞춰 영업지점별로 직원당 200계좌를 유치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거다. 한 대형증권사도 영업직원은 1인당 75계좌, 사무직원은 1인당 25계좌씩 ISA 할당량을 채우라고 공문이 내려왔다.

직원들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주요성과지표(KPI) 점수를 낮게 받아 승진 인사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며 전전긍긍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판매자격증이 없는 직원들까지도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계좌개설에 관한 동의 서명만 받는 등 실명제 위반까지 감수하며 불법 영업도 횡행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 은행 직원은 “기존 고객들에 ISA 영업을 하다 보니 온종일 지점에 대기인 수가 20명이 넘었고 간단한 업무를 보러 온 고객도 20~30분씩 대기해야 했다”며 “벌써 이런 데 실제 ISA가 출시되고 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문제는 정작 어떤 은행이나 증권사도 ISA 계좌에 담길 상품이나 수수료 구조가 어떤지에 대해 발표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경품이나 높은 환매조건부채권(RP) 수익률에 이끌려 사전가입을 하는 고객들은 정작 ISA 수수료나 포트폴리오 구조, 예상수익률 등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ISA에는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상품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원금손실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사전설명이 필요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1인당 의무적으로 수 백 계좌를 판매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충분한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며 “고객들의 문의가 많지만 현재 줄 수 있는 답변은 소득에 따른 가입조건이나 절세 혜택 정도뿐”이라고 밝혔다.

금융권에선 이번 ISA 출시상황이 지난 2009년 주택청약종합저축 당시의 은행권 과열경쟁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도 은행들은 주택청약종합저축을 ‘만능통장’으로 부르며 KPI배점을 최우선적으로 배정하고 직원 1명당 200~300계좌까지 유치토록 강요하는 등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출시 한달째인 그해 5월에만 538만명의 가입실적을 올린 바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세제혜택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면서 가입자의 불만이 커졌고 상품설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불완전 판매가 이뤄지면서 대규모 민원이 발생한 바 있다. 한 시중은행 직원은 “지난 2009년에도 주택청약종합저축을 1인당 수 백 계좌씩 할당을 받아 상품에 대해서 설명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이렇자 금융당국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금융위 청사에서 ‘ISA 준비 상황 점검 회의’를 열고 “ISA는 대다수 국민이 가입대상이고 세제혜택을 주는 상품인 만큼, 투자자 보호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은 불완전판매 예방대책 마련과 함께 대대적인 단속에 나설 계획이다. 불완전판매 우려가 해소될 때까지 미스터리 쇼핑(암행점검)과 불시 점검 등 현장 점검을 주기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또 ISA 수익률 비교 공시 체계를 구축해 어느 회사의 운용 능력이 우수한지를 잘 알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분기별로 발표되는 수익률에 따라 손쉽게 계좌를 옮길 수 있도록 해 결국 실력으로 검증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임 위원장은 “수익률은 적당히 맞추고 유치 고객 수나 점유율 같은 외형 경쟁에 치중하고자 하는 금융회사가 있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며 “각사에서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객별로 다양하고 최선의 상품을 설계하는 등 ISA가 고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상품이 될 수 있도록 힘써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금융소비자원은 “ISA 판매는 의무 가입기간 축소, 고객투자성향 제도 개선, 금융사 배상책임 등 소비자보호 관련 제도를 보완한 뒤 시행해야 한다”며 “준비가 미진한 상태에서 시판하면 불매운동까지 전개하겠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