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재정 수치 매몰될 때 아냐”…800조+α ‘슈퍼예산’의 딜레마

by김상윤 기자
2026.08.25 16:25:24

당정, 지출 구조조정 내건 적극재정…AI·3대 메가 집중
반도체 호황 세수로 복지·반복지출까지 확대
李 추가 사업 주문에 기획처 “부족하면 국회서 증액”
삭감 사업 복원·신규 증액 땐 구조조정 효과 반감

[이데일리 김상윤 공지유 황병서 기자] “국가 예산은 짧은 이불과 같아서 머리를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가 나온다.”

한정된 재원으로 모든 정책 수요를 충족할 수 없는 만큼 우선순위를 정하고 덜 시급한 지출은 걷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800조원대 내년도 예산안은 짧은 이불을 어디에 먼저 덮을지 정하기보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바탕으로 이불 자체를 키우는 데 무게를 뒀다.

반도체 초호황(슈퍼사이클)에 따라 내년 국세수입은 당초 전망보다 100조원 이상 더 걷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내년 예산도 8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경기 흐름에 따라 줄어들 수 있는 세입으로 한번 도입하면 축소하기 어려운 반복지출까지 함께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눈앞의 재정수치 관리에 매몰될 때가 아니다”며 확장재정에 힘을 실은 가운데 국회 심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지출을 충분히 걷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성장투자부터 수당·등록금까지…지출 전방위 확대

이 대통령은 2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제37회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인공지능(AI) 대전환으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우리 경제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여건을 맞이하고 있다”며 “늘어난 재정 여력을 미래에 더 많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한 씨앗으로 확실하게 삼아 생산적 재정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은 눈앞의 재정수치 관리에 매몰되는 우를 범할 때가 아니다”며 “소중한 미래재원을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분야에 투입해서 지금의 1만원을 내일은 10만원, 그 후에는 100만원으로 키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장의 재정지표 관리보다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분야에 재정을 적극적으로 투입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같은 날 정부와 민주당도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당정협의를 열고 ‘적극재정’ 기조를 공식화했다. 한병도 민주당 원내대표는 “재정 여력이 커진 만큼 어디에, 먼저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세워야 한다”며 청년과 지방 주도 성장, 미래전략 등에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권칠승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내년도 예산안은 대한민국의 대도약뿐 아니라 대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도 “적극적인 재정운용을 통해 ‘대체불가 대한민국’으로의 대도약을 뒷받침하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당정이 제시한 집중 투자 분야는 △AI 및 3대 메가프로젝트 △우주·항공과 바이오 등 미래 성장동력 △청년 성장단계별 지원 △K자형 양극화 대응 및 지방주도 성장 △국민안전 등이다. 당정은 반도체 특별회계를 신설해 관련 지원체계를 통합하고 AI 모델 개발과 컴퓨팅 인프라 지원도 확대하기로 했다. 2030년 달 착륙을 위한 연구개발과 자율주행차 시범지역 확대도 추진한다.

지원 범위는 성장산업에 그치지 않는다. 전기차 구매보조금을 확대하고 18세까지 지원하는 ‘우리아이 자립펀드’를 신설한다. 아동수당은 아동기본수당으로 확대·개편하고 지방국립대 등록금은 전액 지원한다. 지방에 이전하는 앵커기업에는 설비투자를 지원하고 지역 필수의료 특별회계도 신설한다.

더불어민주당 한병도 원내대표가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27년 예산안 당정 협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국회 예결위 정태호 간사, 이광재 예결위원장,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한 원내대표, 권칠승 정책위의장. (사진=연합뉴스)
호황 세수는 변동, 반복지출은 고정…지속 가능성 우려

적극재정의 성패는 늘어난 지출이 실제 성장으로 이어지는지, 세입 여건이 바뀌어도 감당할 수 있는 구조인지에 달려 있다. 충분한 지출 구조조정 없이 예산만 확대할 경우 국가채무가 늘고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특히 수당과 등록금 지원처럼 수혜자가 계속 발생하는 사업은 도입 이후 지출을 축소하기 어렵다. 반면 반도체 업황과 기업 실적에 영향을 받는 세입은 경기 흐름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 호황기에 늘어난 세수를 반복적으로 재원이 필요한 사업에 투입하면 향후 세입 여건이 악화할 때 재정 부담이 빠르게 커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부는 신규 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저성과·비효율 사업을 감축하거나 폐지하고, 이를 핵심 국정과제에 재투자하는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한다는 방침이다. 기존 지출을 유지한 채 신규 사업만 추가하기보다 재정사업의 우선순위를 다시 짜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도 “정부는 불요불급한 예산은 과감하게 조정해서 재정의 건실한 운영을 도모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출 구조조정은 간단치 않다. 최대 변수는 국회 심의 과정이다. 정부안에서 삭감된 사업이 국회 심사과정에서 복원되는 동시에 정부안에 없던 신규 사업까지 증액되면 당초 계획한 구조조정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지역구 사업이나 이해관계가 얽힌 ‘쪽지 예산’을 둘러싼 증액 요구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AI 등 신산업 육성에 집중하는 건 긍정적”이라면서도 “역대급 초과 세수로 각 부처에서 자신들의 사업에 대한 재정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 낭비성 예산은 단호하게 걷어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