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은주, 순자, 영옥씨…120년 美이민사 아픔이 만든 '아메리칸 드림'

by김정남 기자
2020.11.12 20:00:00

美 연방 하원의원에 한국계 최대 4명 유력
스틸, 스트릭랜드 이어 영 김도 당선 가능성
꿈 좇아 이민 후 소수인종 고난 겪은 공통점
"목소리 못 내는 이들 위해 목소리 내겠다"
앤디 김, 재선 확정…'샛별' 데이비드 김 주목
"파워 커지면 한·미 의회 교류 수월해질 것"

(왼쪽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공화당 소속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한국이름 ‘순자’로 알려진 민주당 소속 메릴린 스트릭랜드,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한국계 영 김(한국명 김영옥) 공화당 후보.(사진=연합뉴스)
[뉴욕=이데일리 김정남 특파원] “우리 가족도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지요. 홀로 조그만 가게를 하시던 어머니가 부당한 세금 고지서에 힘겨워 하시는 걸 보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의원을 뽑는 캘리포니아주 제48선거구 선거에 출마해 승리한 공화당 소속의 미셸 박 스틸(한국명 박은주·65) 당선인. 그는 50.9% 득표율로 민주당 현역인 할리 루다 의원을 1.8%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전체 435개 하원 지역구 중 가장 치열한 접전 지역으로 꼽힌 곳에서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것이다.

‘은주씨’ 스틸 후보가 하원의원에 도전장을 던지며 선거팀 홈페이지를 통해 털어놓은 이야기는 120년 한국 이민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청소년기 때 어머니, 두 여동생과 희망을 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달랐다. 스틸 후보는 “어머니는 홀로 일하는 이민자로서 주(州)에서 요구하는 부당한 세금을 어쩔 수 없이 냈다”며 “어머니가 힘겨워하는 걸 본 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큰 목소리로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스틸 후보의 1호 공약은 ‘모든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위해 세금을 낮추는 것’이다. .

1992년 한인 상점들이 습격당하는 등 한인사회가 큰 피해를 입었던 로스앤젤레스(LA) 폭동 사태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미국 내 소수계인 한인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틸 당선인뿐만 아니다. 올해 미국 연방 하원선거에서 최대 4명의 한국계 당선인이 배출될 전망이다. 사실상 한국계가 미국 주류 정치에 입성하는 원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스틸 당선인에 앞서 230년 미국 의회 역사상 한국계 여성으로는 처음 하원행(行)이 결정된 이가 있다. 워싱턴주 제10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순자씨’ 메릴린 스트릭랜드(58·민주당)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돌이 지난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하다고 한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며 “(내가 어렸을 적 미국에서) 부모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차별과 고난을 견뎌내셨다”고 돌이켰다. 그는 “부모님은 나에게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공동체에 봉사하고 약자를 위해 일어서라고 가르치셨다”며 “그 가치관은 (정치의 꿈을 이룬) 오늘날 나에게 영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그가 어머니 김인민(90) 여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이유다. 스트릭랜드 당선인은 2007년부터 워싱턴주 타코마 시의원으로 일했으며, 2010년~2017년 타코마 시장을 역임했다.

캘리포니아주 제39선거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 소속 영 김(한국명 김영옥·57) 후보도 있다. 그 역시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다. 그는 “이민자, 작은 가게 주인, 그리고 어머니로서 투쟁하며 살았다”며 “(당선된다면) 워싱턴 정가에서 사리사욕을 버리고 초당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옥씨’ 김 후보까지 당선되면 3명의 한국계 여성이 미국 하원에 진출하게 된다.

미국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소속 앤디 김 하원의원.(사진=연합뉴스)
지난 의회에서 435명의 연방 하원의원 중 유일한 한국계였던 민주당 소속 앤디 김(38) 의원은 재선에 성공했다. 뉴저지주 제3선거구에서다. 그는 1993~2000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81) 전 의원 이후 첫 한국계였으며, 이번에 또다시 워싱턴행을 확정했다.

올해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하원선거에 나선 한국계 후보는 총 5명이었다. 최대 4명이 당선되는 건 예상 밖 성과라는 게 한인사회 안팎의 평가다.

30년 가까이 미국 정치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는 이데일리와 통화에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연방 하원의원이 4명 나오는 건 엄청난 쾌거”라며 “한국계가 주류 정치권으로 진입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일본계, 중국계와 함께 아시안계의 한 축으로서 미국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 낙선한) 민주당 소속 데이비드 김(35·캘리포니아주 제34선거구) 역시 주목해야 한다”며 “그는 아시안계의 ‘라이징 스타(떠오르는 샛별)’로 평가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였던 앤드루 양의 공식 지지를 받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코리안 파워’가 세지면 한국 정치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 대표는 “지난 의회에서 앤디 김 의원이 한미간에 중요한 가교역할을 많이 했다”며 “한국계 4명이 움직이면 한·미 의회 교류가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