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달러가치 급락, 언제까지..흔들리는 '달러패권'
by방성훈 기자
2020.08.03 18:00:48
'안전자산' 美달러 10년내 최대폭 하락
코로나 부양책에 쌓여가는 빚…美경제회복에 걸림돌
美파산기업 속출…고용·소비 악화 우려↑
유로화 강세 속 기축통화 장담 못해…"英파운드 보라”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코로나19를 계기로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미 달러화 가치가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가운데 신용등급 전망은 하향됐고,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미국 경제의 성장 둔화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달러 패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분석이 심심찮게 나온다. 최근 골드만삭스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상실 가능성을 경고한 데 이어 3일(현지시간) 블룸버그는 미 달러화 가치 하락이 미국 정책 입안자들의 코로나19 통제력 상실에 대한 시장의 경고라고 지적했다.
미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에 따르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지난 7월30일 93.02까지 떨어지며 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월간 하락률로는 4.1%을 기록하며 지난 2010년 9월 마이너스(-)5.4% 이후 9년10개월 만에 가장 크게 밀렸다.
일반적으로 세계 경제가 좋아질 것으로 예상되면 달러화 가치는 떨어진다. 투자자들이 기축통화이자 안전자산인 달러화를 팔고 신흥국 통화나 주식시장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에 기인한 하락인 만큼 이전과는 다르다. 미국 경제가 반등을 멈출 것이라는 우려로 투자자들이 달러화 하락에 베팅하고 있다는 것이 시장의 목소리다.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28일 미국 경제의 추가 경기부양책과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채권 매입 정책이 달러가치 하락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값 상승세가 바로 그 방증이라는 분석이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2.9%로, 통계를 집계한 이래 73년 만에 최악의 수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타격이 공식 확인된 셈이다. 3분기에 다시 회복된다고 해도 그 폭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 의회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섯번째 대규모 코로나19 부양법안을 마련, 시행토록 할 계획이다. 미국은 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위해 현재까지 3조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추가 부양책 규모는 4조~5조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렇게 나간 돈이 결국엔 갚아야 할 빚이라는 점이다.
신용평가사 피치가 지난달 31일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A(최고등급)’로 유지하면서도,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한 것도 재정지출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피치는 올해 미 정부의 재정적자가 GDP 대비 20%에 달하고, 내년에는 정부부채가 GDP의 130%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피치는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크게 늘려 재정이 악화하고 있지만 신뢰할 만한 재정강화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 연준이 정부의 부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물가 상승을 용인하고 제로(0) 금리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도 인플레이션 우려를 높여 달러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연준은 지난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직후 성명을 통해 “완전 고용 및 물가 안정 등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전방위적 수단을 동원해 미 경제를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경제회복에 대한 부정적 기류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실물 경제에서도 끊임없이 파산 기업이 속출하며 침체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미국파산협회(AB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3600여개 미국 기업이 법원에 파산법 제11조(챕터11)에 따른 파산보호 신청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지난 2012년 이후 최다 기록으로, 대부분이 코로나19 사태 이후에 몰렸다.
기업 파산은 에너지업계와 소매업계 등에서 두드러진다. 미 셰일오일 기업 화이팅 페트롤리움이 첫 파산 신청으로 충격을 준 데 이어 미국 ‘셰일혁명의 상징’ 체사피크마저 지난 6월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현재까지 20곳 이상의 에너지 기업들이 파산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소매업계에서는 브룩스 브라더스와 JC페니, 니먼 마커스 그룹, 제이크루 그룹에 이어 2일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고급 백화점 체인 로드앤테일러마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그동안 미국을 이끌어 온 주요 제조업체들의 2분기 실적은 실망 만을 안기고 있다. 보잉과 제너럴일렉트릭(GE), 제너럴모터스(GM) 등이 지난 2분기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으며 향후 전망도 어둡다.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몸집을 줄이게 되면 고용시장에도 충격을 주게 된다. 이는 미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주당 600달러의 실업수당을 계속 지급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해외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글로벌 기업들에게는 달러화 약세가 오히려 이득이 될 수도 있다. 글로벌 경제도 함께 되살아나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해외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늘릴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분석했다.
대부분의 무역거래와 외환거래가 달러화로 이뤄지고 있는데다,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 국채가 달러화 표기 자산인 만큼 당장 달러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잃게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특히 지난달 21일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이 7500억유로 코로나 경제회복기금 조성에 합의, 유로화가 강세를 지속할 것으로 관측되면서 달러화 위상을 흔들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달러지수에서 유로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57.6%에 달한다. 유로화 가치가 오르면 달러지수는 하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EU 명의로 채권이 발행되면 ‘하나의 유럽’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며 유로화가 보다 안정적인 통화로 자리매김하게 되며, 채권 발행·매매·상환 과정에서 유로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 통화가치도 높아진다. 지난달 31일 유로·달러 환율은 연초대비 5% 상승한 유로당 1.178달러로 마감했다.
미 비영리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의 브래드 세처는 “미 행정부의 잘못된 경영이 달러화 가치를 서서히 떨어뜨리고 있다. 미국 경제가 유럽보다 더 나은 상태로 올해를 마무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 백악관 경제고문이자 하버드 경제학자인 제프리 프랑켈도 “미 달러화가 그 지위를 잃을 수 없을 것이란 믿음은 틀렸다”며 “영국 파운드화가 기축통화 지위를 잃었던 사례를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