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2020]①'악마를 보았다' 조주빈…'용서는 없다' 디지털성범죄

by정병묵 기자
2020.12.23 17:46:56

'n번방' 성착취물 조주빈 일당 대거 소탕 중형 선고
미성년자 디지털 성착취물 범죄 관련 인식 전환 계기
"아직 처벌 약해"…'손정우 사건' 재발방지 목소리도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멈출 수 없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 감사합니다.”

지난 3월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 앞. 텔레그램 ‘n번방’에서 미성년자 포함 여성을 상대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해 전 국민을 경악케 한 ‘박사’ 조주빈(25)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인이 아닌 성폭력 범죄자 최초로 ‘포토라인’에 섰다.

목 보호대를 하고 거만하게 기자들 앞에 나선 조주빈에게 반성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돈을 뜯어내려고 협박했던 “손석희 (JTBC) 사장님,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 시장님 등에게 사죄드린다”면서 유명인사들을 언급,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냥 과시했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11월 22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 1심 결심공판에 참석한 조주빈에게 7개월 전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검찰이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 범죄단체조직·가입·활동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하자 조주빈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최후진술에서 조는 “범행 당시 저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제가 벌인 일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며 회피하지 않고 제 인생을 바쳐 피해자 분들께 갚아가겠다”고 울먹였다.

‘자칭 악마’가 흘린 반성의 눈물은 통하지 않았다. 11월 26일 재판부는 조주빈에게 징역 40년을 선고했다. 아울러 △신상정보 공개·고지 10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장애인복지시설 취업제한 각 10년 △전자발찌 부착 30년 △범죄수익금 약 1억604만원 추징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해자 다수를 다양한 방법으로 유인·협박해 성 착취물을 제작하고, 이를 장기간 다수에게 유포하며 그 과정에서 제3자에게 아동·청소년피해자를 직접 강간하도록 지시했다”며 “또 다른 피해자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질책했다. 조주빈은 현재 항소한 상태다.

조주빈과 함께 재판에 넘겨진 공범들에게도 줄줄이 중형이 내려졌다. 별칭 ‘태평양’ 이모(16)는 범행 당시 만 15세인 점이 고려돼 징역 장기 10년·단기 5년을 선고받았다. 조주빈에게 자신의 고등학교 담임교사 딸에 대한 살인을 청부한 사회복무요원 강모(24)는 징역 13년, 거제시청 소속 공무원이었던 천모(29)는 징역 15년, ‘오뎅’ 장모(41)는 징역 7년, ‘블루99’ 임모(34)는 징역 8년을 각각 받았다. 또 다른 공범 ‘부따’ 강훈(19)과 ‘이기야’ 이원호(20·군복무)는 최근 각각 징역 30년형을 구형받았다.

“조주빈은 내 제자”라며 n번방의 ‘원조’를 자처하던 ‘갓갓’ 문형욱(25) 일당도 법의 심판을 속속 받고 있다. 문형욱의 공범 안승진(25)은 징역 10년, 김모(22)는 8년을 선고받았다. 문형욱에게는 10월 무기징역이 구형된 상태다.



[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n번방 사건은 우리 사회에 준 충격만큼 디지털 성범죄 처벌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지금까지 디지털 성범죄는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적은 형량을 받기 마련이었으나 조주빈이 받은 ‘징역 40년형’은 상당한 중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반응이다. 법조계에선 아동·청소년 음란물 제작 등 혐의만 인정됐을 때 최대 징역 15년 정도일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다. 하지만 법원은 조주빈에게 성범죄 관련 ‘범죄단체 조직 혐의죄’꺼자 적용해 예상보다 강한 형을 선고한 것이다.

한 번 퍼지면 무한 재생산되는 디지털 성착취물의 심각성을 감안해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할 경우 양형 기준도 새롭게 마련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8일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을 확정, 내년 1월 1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바뀐 양형기준은 디지털 성착취물 제작의 경우 △기본 5~9년 △가중처벌 7~13년 △특별가중처벌 7년~19년6개월 △다수범 7년~29년3개월 △상습범 10년6개월~29년3개월 등으로 이전보다 상향됐다.

또한 국회는 지난 5월 n번방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 인터넷 서비스 기업에 더 강력한 자정 의무를 부여한 이른바 ‘n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ㆍ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네이버, 카카오 등 인터넷 사업자에게 불법 음란물을 삭제하고 관련 접속을 차단하도록 기술적 조치를 취하는 책임을 부과했다. 법을 어길 경우 사업자는 최대 징역 3년 또는 1억원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여성계에서는 이런 범죄가 ‘n차 피해’를 계속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 만큼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범죄자가 ‘진지한 반성’을 할 경우 양형에 반영한다는 점은 여전히 가해자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고방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백소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수사 과정에서 이미 2차 피해를 겪었다”면서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피해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진지한 반성으로) 감형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또한 해외에 서버를 두고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엄중 처벌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다. 실제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C2)’의 운영자 손정우(24)는 우리 법원이 미국 송환을 불허하면서 풀려나 논란을 빚었다. 손정우는 지난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아동 등의 성 착취물을 게시한 혐의로 2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확정받고 올해 4월 형기가 만료됐다.

손정우를 기소한 미국 검찰은 올해 그의 출소를 앞두고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강제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은 “엄중하게 처벌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범죄인 인도조약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며 송환을 불허했다. 바로 석방된 손정우는 현재 자유의 몸이다. 검찰은 또 지난달 ‘범죄수익 은닉’ 혐의를 적용해 손정우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구속 사유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여성계에서는 “사법부가 아동 성착취 범죄에 가해자 중심 결정을 내린 건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