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급 쓰나미 덮쳤다”..정유업계, 컨틴전시플랜 가동

by김영수 기자
2020.03.11 16:42:37

정제마진 악화속 코로나19에 산유국간 치킨게임까지 ‘트리플 악재’
올 1분기 정유 4사 대규모 적자 우려..사업포트폴리오 다각화 주력
“산업발전·일자리 창출..원유수입관세·투자 인센티브 재고해야”

[그래픽=이미나 기자]
[이데일리 김영수 김정유 기자] “금융위기급 쓰나미가 덮쳤다.” 정유업계가 정제마진 악화,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전세계 확산, 산유국 간 치킨게임 등 ‘트리플 악재’에 휩싸였다.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국내 정유사들은 올 1분기 대규모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유사들은 역대 최악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경영체제(컨틴전시플랜)’를 가동하고 정유부문에서의 수익 악화를 상쇄할 수 있는 화학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등 사업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그간 거론됐던 원유 수입관세와 투자 인센티브 등과 같은 정부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11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2014년 4분기 이후 최악의 실적을 맞이할 위기에 놓인 국내 정유사들이 비상경영체제를 본격 가동하고 나섰다.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당장 정유사들은 저유황유(선박용) 생산을 늘리는 한편 화학부문 역량 강화를 통한 사업포트폴리오 다각화를 중점 추진할 계획이다. 탈황 규제인 ‘IMO2020’(1월1일 시행)과 ‘캐리지 밴’(Carriage Ban; 스크러버를 설치하지 않은 선박의 고유황유 운송 자체를 금지하는 제도로 3월1일 시행) 규제 등으로 저유황유에 대한 수요 증대는 정유사들에게는 또다른 기회다.

SK이노베이션(096770) 관계자는 “올해 정유사들의 실적 악화 수준은 코로나19 여파와 산유국 간 치킨게임 지속 기간에 달려 있다”며 “SK이노베이션은 유가 하락에 따른 전사 영향을 분석, 예상되는 유가 수준 별 시나리오 대응 전략을 수립해 적시 대응 체계를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유가변동 관련 데일리 모니터링 강화, 수익성 제고를 위한 CLX(콤플렉스) 운영 최적화, 각 사업(정유·화학·윤활유 등)별 유가 하락 대응 방안도 수립할 방침”이라고 했다.

SK이노베이션은 특히 IMO2020에 맞춰 진행한 친환경설비 투자 VRDS(감압잔사유 탈황설비) 상업가동이 3월 중순부터 시작되면 2분기부터는 상대적으로 마진이 높은 저유황유 시장을 중심으로 수익성 회복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오는 4월부터 자회사인 SK에너지 등을 통해 총 13만 배럴 수준의 저유황유를 생산·판매할 예정이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다.

SK울산Complex 내 VRDS 현장. (사진=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는 각 사업본부별로 비용절감방안과 추가 수익개선 방안을 수립할 계획이다. 우선 내수 판매 부진으로 발생한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석유 제품 재고를 추가로 해외에 수출하는 등 제품 재고를 최소화하고 저유황유 생산을 하루 5만 배럴까지 늘렸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원유도입선 다변화와 공정 효율개선 등을 지속 추진해 원가를 낮출 계획”이라며 “마진이 양호하고 수요가 증가하는 고급휘발유, 선박유 등을 추가 판매해 수익성을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GS(078930)칼텍스도 유가 하락에 따른 예상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을 수립해 적시 대응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IMO2020에 맞춰 기존에 공장 연료로 사용하던 저유황유를 LNG로 대체한 뒤 이를 선박유로 판매해 수요에 대응할 예정이다. GS칼텍스는 현재 전남 여수의 43만㎡ 부지에 2조7000억원 규모의 올레핀 생산시설을 짓고 있으며 공장이 완공되는 내년부터는 에틸렌 70만톤, 폴리에틸렌 50만톤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GS칼텍스는 이를 통해 기존 사업과 연계한 시너지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

에쓰오일 역시 유가 하락에 따른 구체적인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각 시나리오별 전략을 수립해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2018년 11월 RUC/ODC(잔사유 고도화시설과 올레핀 하류시설) 프로젝트의 상업가동을 개시해 석유화학 비중을 기존 8%에서 13%로 확대한 상태다. 여기에 저유황경유 생산을 늘리기 위해 RUC/ODC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중질유 분해시설을 신규로 설치해 고유황 벙커-C 비중을 크게 낮췄다.

정유업계에서는 자체적인 자구계획과 함께 정부 차원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표적으로 원유 수입관세와 투자 인센티브 등과 같이 정유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재고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대체로 관세는 자국산업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물리는 건데 우리나라는 원유를 생산하지 않는 비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세수확보차원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현 상황을 감안하면 다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2%였던 원유수입관세는 그 이듬해인 2009년 3%로 상승한 후 11년간 유지되고 있다.

정유업계는 생산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 단위 시설, 안전 설비투자가 필수적인 만큼 설비투자 인센티브 제도 역시 손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비투자 인센티브는 조세특례제한법상 기업들이 설비투자시 일정 수준 세액을 공제해주는 제도(3년 일몰)다. 지난해 조특법 개정 때 여야 모두 대기업이 안전시설에 투자하면 세액공제율을 1%에서 3%로 확대하는 개정안을 내놨지만 정부 반대로 처리되지 못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올 1분기 정유 4사 모두 대규모 적자전환이 예상되는 가운데 외생변수인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소비침체가 이어진다면 적자의 늪도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유사들의 투자 확대는 관련 산업 발전과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 등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