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제동+개헌 유도..일단 '급한 불끄기' 나선 朴
by이준기 기자
2016.11.29 18:08:38
[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임기단축을 포함한 자신의 진퇴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공을 다시 정치권에 떠넘겼다. “정권 이양의 일정과 법 절차를 국회가 만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정치권 원로들과 친박(친박근혜)계 핵심 중진들의 개헌을 염두에 둔 이른바 ‘질서 있는 퇴진’을 받아들인 모양새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퇴진’에 대한 각 당과 계파, 대선주자 간 생각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점을 겨냥한 무거운 숙제만을 여야에 넘긴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턱밑에까지 치고 온 탄핵에 제동을 걸어 시간을 버는 동시에 보수층 결집 시도와 이에 따른 정권 재창출을 통해 ‘안위 보장’을 꾀하는 마지막 ‘승부수’라는 분석이 나온 이유다.
박 대통령의 이날 대국민담화는 여야가 합의한 퇴진 로드맵에 자신의 거취를 맡기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당장 “국회추천 총리 하나 뽑지 못하는” 정치권에 실현 불가능한 공을 던진 것이다. 더 나아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임기단축을 포함한’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거취 결정에 ‘개헌’까지 끌어들였다. 대통령의 임기단축을 하기 위한 유일한 법적 수단이라는 점에서다. 이는 개헌에 선을 긋는 더불어민주당과 어느 정도 공감하는 국민의당의 ‘분열’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힌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간에도 그 간극이 워낙 커 ‘블랙홀’로 작용할 수도 있다. 퇴진 시기를 못 박지 않은 건 여야가 ‘합의’한 시기에 맞춰 물러나겠다는 것인데, 정권이양 시기는 차기 대선일정과 맞물려 움직인다는 점에서 여야, 계파, 대선주자 간 다른 셈법을 파고든 전략으로 읽힌다.
반면 탄핵 전선을 넓혀가는 새누리당에 제동을 거는 효과는 톡톡히 봤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여권 내 탄핵의 원심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다. 실제 정진석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의 담화와 관련, “자신의 거취를 국회에 백지 위임한 것으로, 사실상의 하야 선언”이라고 평가하며 탄핵 절차의 원점 재검토를 야권에 촉구했다.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150명) 이상의 발의로 재적 3분의 2(200명)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되는 탄핵소추안은 새누리당에서 29명이 동조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날 ‘퇴진’ 발언으로 새누리당 비박계가 발을 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대국민담화가 아닌 대비박계담화”(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처럼 정치권의 혼돈이 가중되면서 박 대통령은 다시 한번 시간을 벌 여지가 생겼다. 최소한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으로 물러나기보다는 ‘질서 있는 퇴진’을 선택, 최소한의 명예는 지키게 됐다는 점은 ‘덤’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아무리 식물이라고 해도 역시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며 “꼬일 대로 꼬인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 이어지는 형국”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암중모색을 유지하다 향후 자신의 안위를 약속할 수 있는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와 정치적 빅딜을 하기 위한 시간벌기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다른 관계자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등장으로 보수층은 급속도로 결집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했다. 교토통신은 이날 반 총장이 “내년 1월 1일 한국으로 돌아가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위해서 뭐가 가능할지 친구들,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자신을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이자 피의자로 지목한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를 부인하는 ‘최후 변론’도 불사했다.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은 정상적 통치행위로 이뤄진 것으로, 최순실 일당의 비리는 몰랐으며 자신은 사적 이익을 취한 바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박 대통령은 “돌이켜보면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저는 1998년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통령에 취임해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왔다”며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통해 거듭 ‘무죄’를 강조했다. 이를 두고 특검수사를 앞둔 방어전선을 구축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