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없는 안보' 준비하는 유럽…재정준칙 금기 깼다

by정다슬 기자
2025.03.05 15:35:31

트럼프발 안보쇼크, 유럽에 덮쳐
가장 재정준치 엄격한 독일도 "신속히 강화해야"

영국 런던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2025년 3월 2일, 유럽 안보 및 우크라이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유럽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담에는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캐나다의 저스틴 트뤼도 총리,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이사회 의장 안토니우 코스타, 덴마크의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 스웨덴의 울프 크리스테르손 총리, 노르웨이의 요나스 가르 스퇴레 총리, 핀란드의 알렉산더 스투브 대통령 및 기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사진=로이터)
[이데일리 정다슬 기자] 유럽이 재정준칙이라는 금기를 풀고 국방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통해 유럽에 제고했던 ‘안보우산’이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일명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 Plan)을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EU 행정부 격인 집행부는 국방비는 EU 재정준칙 적용을 면제해준다. 현재 EU 회원국은 재정준치에 따라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해야 하며 초과 시 EU 차원의 제재를 받는다. 그러나 국방비는 이 계산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유럽국가들이 GDP의 1.5%만큼 지출을 늘린다면 4년 동안 EU 전체적으로 6500억유로(998조원) 상당의 국방비를 추가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EU에 따르면 전체 27개 회원국 중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속한 23개국의 국방비 평균은 GDP 1.99% 수준으로, 만약 1.5%포인트 지출이 추가로 이뤄진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나토 회원국에 요구하고 있는 GDP 3% 이상 국방비 지출 조건을 달성하게 된다.

아울러 폰데어라이네 위원장은 회원국들에게 방공체계·미사일·드론 등 각종 무기 조달을 위한 저금리 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대출규모는 1500억유로로 EU집행위는 채권을 발행해 예산을 조달할 예정이다. 그는 “이는 회원들이 함께 공동 구매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확대도 가능하다”라고 강조했다.

EU 다년간 예산에 할당된 ‘결속 정책’(Cohension Policy) 관련 예산을 국방비를 위해 사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현재 이 예산은 가난한 회원국이 경제 개발에 드는 비용을 지불하는 데 사용된다. 기존에는 EU 기금 사용 시 대기업 지원 제한, 다른 용도 이전 금지 등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하지만 국방 부문에 한해서는 완화된 규정과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아울러 유럽투자은행에 대한 규제 완화를 통해 국방부 대출을 확대하거나 세계은행이 현재는 할 수 없는 순수한 군사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집행위는 오는 6일 특별정상회의에서 이날 발표된 내용을 원칙적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최종적인 결정은 이달 말 정례 정상회의에서 이뤄질 전망이다. 만장일치가 아닌 가중다중결(EU 전체 인구 65%·15개국 이상 표결) 표결이므로 통과될 확률이 높을 것으로 전해졌다.



EU 국가 중 가장 재정준칙에 엄격한 독일도 눈앞에 당면한 위협에 지갑끈을 푼다. 도이체벨레,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독일 차기 정부 구상을 협상 중인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연합과 사회민주당(SPD)은 국방비 조달에 필요할 경우 GDP의 1% 이상 부채를 허용하도록 헌법(독일 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차기 정부 총리로 가장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는 “독일과 유럽은 방위 역량을 신속히 강화해야 한다”며 “기민당, 기사당, 사민당은 기본법을 개정해 GDP의 1%를 넘는 국방비가 ‘부채 브레이크’에서 면제되도록 동의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라르스 클링바일 사민당 대표도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 충돌 사태를 언급하며 “유럽 방위와 안보를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고 합의 이유를 밝혔다.

독일 기본법은 정부 신규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제한하는 재정준칙을 두고 있는데, 국방비에 대해서는 GDP의 1%를 넘을 수 있도록 개정한다는 것이다.

기본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2024년 GDP 기준 450억 유로(약 69조5000억원) 이상의 국방비 지출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독일은 지난해 GDP의 2%인 860억유로를 국방비에 지출한다. 그러나 이중 500억유로만 정기예산에서 나오고 나머지는 2022년 만들어져 2027년 만료되는 1000억유로 예산 밖 기금에서 조달한다. 이 때문에 헌법 개정 없이는 국방비 지출을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아울러 기민당·사민당 연합과 사민당은 장기적 경제 성장을 위해 산업·인프라 분야에 향후 10년간 5000억 유로의 대규모 특별 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메르츠 대표는 “국방비 추가 지출은 우리 경제가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안정적 성장으로 복귀해야 흡수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인프라에 신속하고 지속 가능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메르츠 대표는 내주 연방의회 임시회의를 소집해 헌법 개정과 특별기금 조성 등을 담은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국방비 확대에 반대하는 독일대안당(AfD)과 좌파당(Die Linke)가 차기 의회에서 입법저지선(210석)을 넘는 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또한 녹색당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펠릭스 바나샥 녹색당 대표는 “부채 제동장치 개혁은 안보뿐만 아니라 기후, 경제성장, 그리고 인프라 투자를 보장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