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암살 핵심 용의자 4명 평양 복귀…北 배후 밝히기 어려울듯

by김관용 기자
2017.02.20 17:13:37

北 인터폴 미가입, 말레이와도 범죄인 인도조약 안맺어
北, 사건 조사 비협조…되려 "조작됐다" 공동조사 요구
체포된 리정철, ''주범'' 아닌 후방 지원 역할 한듯
꼬리자르기 될라, 北 배후 못밝히고 미궁에 빠질수도

[이데일리·김관용 기자] 김정남 암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남성 4명이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 북한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이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에 가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범죄인 인도조약도 맺지 않아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19일(현지시간) 발표한 1차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정남 암살 사건 용의자는 모두 7명이다. 이중 직접 암살을 감행한 베트남 국적 여성 도안 티 흐엉(29)과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시티 아이샤(25)는 이미 체포됐다. 이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북한 국적 남성 리정철(46) 역시 지난 17일 밤 경찰에 붙잡혔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북한 국적의 용의자인 리지현(33)·홍송학(34)·오종길(55)·리재남(57)의 행방을 인터폴과 협력해 쫓고 있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은 이들 4명이 지난 13일 범행 직후 출국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7일께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도주 경로 세탁을 위해 3박 4일에 거쳐 1만6000km를 날아 평양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이들 4명의 용의자는 지난달 말부터 말레이시아에 2∼3일 간격으로 차례로 입국했다. 홍송학이 지난달 31일 말레이시아에 들어왔으며 리재남은 이튿날인 2월 1일에, 리지현은 그로부터 사흘 뒤인 4일에, 오종길은 7일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에 입국했다. 이들은 13일 흐엉과 아이샤를 시켜 김정남을 암살하고 이날 한꺼번에 출국했다.

북한 국적 용의자들은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따로 입국하고 치밀한 계획 하에 범행 후 일시에 달아났다는게 현지 경찰의 판단이다. 이들은 김정남의 말레이시아 입·출국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남의 일정과 동선을 잘 아는 누군가로부터 정보를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말레이시아 경찰청이 페이스북에 공개한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의 모습.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리지현, 홍송학, 리재남, 오종길.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말레이시아 당국이 이들을 강제 송환해 조사할 수 없어 자칫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은 국제범죄의 신속한 해결을 위해 인터폴에 가입하고 있다.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하면 인터폴을 통해 ‘적색수배’를 내린다. 가입국들은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범죄자의 소재를 파악한다.



그러나 190여 인터폴 가입국가 중 북한은 빠져 있다. 이 때문에 말레이시아 당국은 인터폴을 통해 용의자의 해외 경유지 및 체류 정보는 알 수 있지만 북한 내 정보는 얻을 수 없다.

설사 말레이시아 경찰이 북한 내 이들의 행방을 찾았다 하더라도 북한이 체포해 송환할 의무도 없다. 해당 국가 간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과 말레이시아는 2009년 무비자 협정을 체결할 정도로 가깝게 지내지만 범죄인 인도조약은 맺지 않았다.

북한이 스스로 용의자들을 체포해 말레이시아에 송환할리도 만무하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은 김정남 시신 부검에 반대하면서 조속한 시신 인계를 요구하는 등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를 방해한바 있다. 말레이시아 주재 강철 북한 대사는 20일 말레이시아 외교부에 소환된 자리에서도 “김정남 피살 사건의 경찰 수사결과를 믿을 수 없다”면서 “수사가 정치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공동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말레이시아 경찰청의 김정남 피살 이후 첫 공식회견 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건의 진상 규명은 체포된 리정철의 ‘입’에 달려있다. 그러나 리정철은 이번 사건을 기획한 핵심 용의자가 아니라는게 중론이다. 19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중문매체 중국보에 따르면 경찰 조사에서 리정철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범행 시간에 공항에도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도 흐릿한 공항 CCTV 화면에 등장하는 남성 4명 중 리정철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리정철은 도망간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이 탄 차량의 소유자였다. 경찰은 이 차량의 번호판을 추적해 그를 체포했다. 20일 일본 교도통신은 “쿠알라룸푸르 교외에 살면서 현지 회사에 근무해 주변 지리에 익숙한 리정철이 용의자들에게 운전기사와 후방지원 역할을 했다”고 보도했다. 리정철이 범행 직후 말레이시아를 떠나지 않고 자택에서 순순히 경찰에 연행된 것을 감안하면 리정철을 통해 북한 배후설을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여전히 리정철이 북한의 공작원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리정철은 현지 의약품 관련 회사에서 일하면서 쿠알라룸푸르 시내 고급 아파트에서 40대의 부인과 10대인 자녀 2명과 함께 살았다. 단순 근로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말레이시아 파견 북한 해외 근로자들은 보통 가족 없이 단체 생활을 하며 당국의 감시를 받는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중문매체 동방일보는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레이시아에 남은 리정철은 도주한 주범 4명에 의한 ‘안배된 희생양’일 것이라고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