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일갈…“중세 다시 도래했다”

by김미경 기자
2022.03.28 17:34:56

신간 '페스트의 밤' 출간 기념 공동 인터뷰
소설 속 120년 전 인간 군상, 현재와 닮아 있어
사실적 묘사가 카뮈 '페스트'와 차이점"
"푸틴 공격은 원시적, "여성 화자로 계속 쓸 것"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중세가 다시 도래했다. 과거의 세계로 퇴보하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오르한 파묵이 팬데믹에 전쟁까지 겹친 현 상황에 대해 이같이 일갈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을 향해서는 “아주 원시적이며 중세적인 행동”이라며 ‘퇴보’라고 명시했다.

파묵은 최근 신작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민음사)의 한국 출간을 기념해 국내 언론과 가진 공동 인터뷰에서 ‘인류는 왜 과거의 경험에서 진일보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최근 신작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을 출가한 노벨문학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사진=민음사).
그는 이어 “우리는 TV에 나오는 가련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인류가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소설가로서 나는 정치적 문제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지만 단지 이러한 상황의 모순을 소설을 통해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출간한 ‘페스트의 밤’을 통해 이러한 인류의 모순을 담았다. 소설은 1901년 동지중해에 있는 가상의 섬 민게르에 3차 페스트가 발생한 이후 사회적 혼란에 빠진 6개월의 시간을 그린다.

이 책은 파묵이 5년간 집필에 매진한 작품이다. 특히 전염병이라는 소재는 파묵의 오래된 관심사였다. 그는 소설 집필을 위해 20세기말과 21세기 초 페스트 발병 때 영국 의사들의 식민지 상황 보고서, 터키 주지사들의 정치 회고록 등 광범위한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이 소설의 원고를 마무리할 무렵 전 세계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집필 중이던 소설의 내용과 팬데믹 현실이 닮아 오히려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까 우려했다며 이 때문에 ‘뉴욕타임스(NYT)’ 등에 전염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내용을 부분 수정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소설 속 120년 전 인물과 현재 방역에 대처하는 인간의 태도는 비슷하게 닮아있다. 이에 대해 파묵은 “(국가는) 현재의 상태 혹은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해도) 당장 조치를 취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비슷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해 장기간 지속된 방역에 지쳐 반발하기 시작한다”면서 “과거에는 (전염병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면, 지금은 알기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차별성에 대해서는 “‘페스트’는 나치들이 프랑스를 점령한 것을 묘사한 정치적 알레고리(Allegory·추상적 관념을 다른 구체적인 사물로 비유해 표현하는 방법)인 반면 저의 소설은 사실주의적 팬데믹 소설”이라며 ‘페스트의 창궐 당시 인간의 영혼의 반응,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서술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페스트의 밤’의 주요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파묵은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나의 작품에서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모든 것을 보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할 소설을 쓸 예정”이라며 이 같은 선택에 대해 “나는 중동 지역 남성이다. 중동 남성들의 전형적이고 형편없는 사고들이 안타깝지만 나에게도 그런 부분이 존재하며, 이런 모습들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묵은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앞으로도 한국 독자들이 작품을 계속 읽어주기를 바란다”며 팬데믹이 끝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전했다.

“나는 낙관론자다. 이 팬데믹이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한국에 가서 박물관도 방문하고 싶고, 거닐고 싶다.”
신작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을 출간한 오르한 파묵이 책을 번역한 이난아 한국외대 터키어과 교수와 줌을 통해 인터뷰하고 있다(사진=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