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기업, 국제계약에 면책조항 등 러 제재 탈출전략 필요"

by신민준 기자
2022.04.07 18:33:15

대한상의, 러시아 제재 국제계약 영향과 법적 대응방안 좌담회 개최
"기존 계약 채무불이행 문제로 분쟁 소지 있어…사전대비 필요"
"제재로 대금지급 지연 시 불가항력 사유로 면책 어려울듯"

[이데일리 신민준 기자] A사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원료를 수입하는 기업이다. 최근 원료 운송과 관련해서 선주와의 분쟁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태 발생 이후 우크라이나 인근 해상 운송이 어려워져 기존에 정박해서 선적을 대기하고 있던 선박들이 안전항(safe port)으로 대피해 제3지역에 정박하면서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A사는 물품을 일부만 선적한 채 그대로 출항한 선박들과는 부적운임(dead fright) 등이 문제되면서 이러한 추가비용 부담을 누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툼이 있다.

미국 등 주요 국가의 러시아 제재가 지속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러시아 기업들과 체결한 계약과 관련해 채무불이행 책임 등 위험부담 요소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적 대응방안을 사전에 마련하고 추후 모든 국제계약에 제재로 인한 계약 중단·해지 조항 등 면책조항을 넣는 탈출전략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7일 서울 중구 상의회관에서 대한상사중재원과 공동으로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국제 계약에 미치는 영향과 법적 대응 방안’ 좌담회를 개최했다. 좌담회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는 7일 우리나라 기업들이 러시아 제재로 인해 겪고 있는 실제적인 어려움과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소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자 대한상사중재원과 공동으로 ‘대(對) 러시아 제재가 국제계약에 미치는 영향과 법적 대응방안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날 좌담회에는 현대모비스(012330)를 비롯해 포스코인터내셔널(047050), 현대중공업(329180) 등 제조·무역·건설·조선업 등의 국제법무 담당자가 패널로 참석해 업종별로 겪고 있는 국제계약상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했다.

법조계에서는 좌장을 맡은 정홍식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이형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조은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가 참석해 상황별 법적 쟁점을 논의하고 검토 가능한 대응방안을 제시했다.

정홍식 교수는 “러시아 제재로 인해 자동차산업을 비롯한 제조업과 무역상사, 조선업, 러시아에서 건설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건설사들이 큰 영향을 받고 있다”며 “제재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제수단 등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조업의 경우 부품 납품중지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이로 인한 채무불이행을 피하기 위해 제3국을 경유하는 우회수출등의 방안을 모색하는 기업들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에 대한 가능여부가 주요 쟁점으로 논의됐다.

이형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러시아의 경우 이란 제재와는 달리 포괄적 제재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행정명령에서 금지한 특정 거래가 아니라면 우회수출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그러나 수출통제에 대한 선진국의 참여도가 높고 미국이 대상 범위를 많이 넓혀놓은 상태여서 해당 물품 뿐 아니라 관련 기술과 일부 부품의 통제 포함여부 등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무역업에서는 물품인도 지연에 대해 불가항력 사유로 인한 면책이 가능한지가 논의됐다. 이에 대해 러시아 내에서 제재는 불법으로 보고 있으므로 불가항력으로 인정받기 어려우며 관할권이 다른 국가에 있을 경우에도 법원마다 불가항력 범위·해석에 대해 이견이 있다. 이로 인한 승소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대다수였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현재 러시아에서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 건설사가 유럽연합(EU) 소재 기업 등의 하도급자 또는 벤더가 러시아 제재로 인해 이행이나 공급을 불이행하게 되는 경우 도급업자가 러시아 발주자에 대해 면책을 주장할 방안이 있는지도 검토됐다.

이형근 변호사는 “제재에 동참하는 미국, EU 업체를 중국이나 국내업체로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면책 주장이 쉽지 않다”며 “제재불법 조항이 포함돼 있더라도 러시아 발주처가 제재 대상자가 아니라면 인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대금지급 지연에 대한 면책도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조은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현재 우리나라의 금융위원회는 러시아 비제재 은행에 돈을 송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며 “실제로도 현재 러시아 비제재은행인 국내은행 모스크바 지점, 외국계열 은행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러시아로 돈을 송금하고 있기 때문에 대금지급 지연에 대한 면책입증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약상 대금을 미국달러로 지급하기로 한 경우에 대해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경제제재가 불가항력 사유인지 여부에 대해 그간 많은 다툼이 있었다”며 “올해 초 영국 고등법원의 중재판정에서 1심 판정부는 대금을 미국달러로 지급하기로 했더라도 현실적인 대안인 유로화로 동일가치를 지급 가능하므로 불가항력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며 “반면 상소판정부에서는 불가항력의 판단기준이 당해 계약상 의무이므로 해당된다고 판정해 계약상 불가항력 조항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좌담회에서는 향후 계약에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도 제시됐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기업들이 국제계약을 체결하기 앞서 취해야 할 조치들로 계약상의 불가항력 조항을 보다 더 구체적인 형태로 기재하고 일방적 계약해지와 중단 조항을 추가하는 방안 등을 내놓았다.

아울러 준거법을 고를 때에 사정변경이나 불가항력에 유리하게 판정될 수 있는 관할권을 선택할 것을 권고했다. 박효민 변호사는 “미국은 이 사태가 평화국면으로 접어든 후에도 상당기간 현재 수준의 대러 제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며 “우리나라 기업들은 계약서에 경제제재 관련 특칙 조항 등을 넣어 향후 분쟁 발생 시 재판부에서 우리 기업에 유리한 판정을 내릴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미리 마련해 놓고 제재 리스크 관리는 항상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