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더 내겠다, 부유세 부과하라"‥美 억만장자들의 품격

by이준기 기자
2019.06.25 15:57:34

11개 명문가문서 19명 서명…소로스·애비게일 등 동참
"부유세 걷어 교육과 보건, 인프라, 환경에 쓰라"
부유세 도입 74% 찬성, 공화당 지지자도 찬성 많아
워런 상원의원 등 정치권도 앞다퉈 부유세 목소리
수정헌법 위배 등 실제 도입까지는 걸림돌만만찮아

사진=AFP
[뉴욕=이데일리 이준기 특파원] “부유세는 공정하고 애국적이며,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총 11개 가문, 19명의 미국 억만장자들은 24일(현지시간) 내년 미국 대선에 도전하는 후보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체 1%의 미국 부자 중에서도 10분의 1에 해당하는 최고 부자들, 우리에게 적당한 부유세를 부과하라”고 촉구했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들이 보도했다. 자신들과 같은 미국의 0.1%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세수는 미국의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이 아닌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 나아가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며 “부유세는 사랑하는 조국을 더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도 했다.

서한에 서명한 19명은 ‘헤지펀드계의 전설’ 조지 소로스와 ‘월트 디즈니’의 손녀딸 애비게일 디즈니, ‘하얏트 호텔 상속녀’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 페이스북 공동설립자인 크리스 휴즈, 미 신발제조기업 스트라이드 라이트 회장인 아널드 하이어트, 찰리 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의 딸 몰리 밍거, IT기업 아사나의 공동설립자인 저스틴 로즌스타인 등이다.

이들 억만장자들은 부유세 도입이 필요한 이유로 △기후변화 완화를 위한 클린에너지 혁신 △보편적 보육 △학자금 대출채무 구제 △인프라 현대화 △저소득층을 위한 세제 혜택 △공공보건 등 6가지를 꼽았다. “미국의 수백만 가족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게 이들 부자들의 생각이다. 리젤 프리츠커 시먼스의 남편이자 투자회사 ‘블루 헤븐 이니셔티브’를 공동 설립자인 이안 시먼스도 “부유세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특정후보를 지지한 건 아니지만, 민주당 대선주자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부유세 공약에 초점을 맞춘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워런 의원은 5000만달러(약 578억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부자들에게는 연간 2% 세금을, 10억달러(1조1560억원) 이상의 큰 부자에겐 3% 세금을 부과하는 부유세 도입하자는 공약으로 내걸었다. 만약 이런 부유세가 도입이 되면, 약 7만5000가구에서 10년간 2조7500억달러(2312조원)에 달하는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게 워런 의원의 설명이다.

사진=AFP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0여년간 미국 하위 50%의 부는 9000억달러 줄어든 반면, 상위 1%의 부는 21조달러가 증가했다. 전미경제조사회도 올해 초 발표한 자료를 통해 “미국 부자 0.1%가 전체 부의 5분의 1가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지난 1970년대 후반 7%에 그쳤던 것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빈부의 격차가 그만큼 커진 셈이다.



부유세 도입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은 지지는 높은 편이다. 지난 2월 발표된 힐-해리스X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유권자의 74%는 부유세 도입에 동의했다. 심지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공화당 지지자의 65%도 부유세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년 미 대선을 앞두고 유력후보들이 잇달아 부유세 도입에 목소리를 내는 이유이다. 현재까지 부유세 정책에 직접 지지를 표명한 후보는 워런 의원을 비롯해 인디애나주(州) 사우스벤드 시장 피트 부티지지, 텍사스주 하원의원 출신의 베토 오루크 등이다.

히지만 부유세 도입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반론도 많다. ‘자산에 대한 세금부과를 금지한다’는 미국 연방정부의 수정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부유세 부과를 위해서는 정확한 자산의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데, 주식이나 채권과 달리 보석·미술품 등은 가격을 책정하기 쉽지 않다.

일각에선 부유세를 도입했던 유럽국가들이 각종 부작용 속에 잇따라 제도를 폐지·축소한 전례를 거론하며 부작용을 우려한다.

부자들이 해외로 자산을 빼돌리는가 하면, 부동산 등 부유세를 부과하지 않은 자산의 가격이 폭등하는 자산가격 왜곡현상이 나타났다.

1995년 기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소속 15개국이 부유세를 도입했지만, 지금은 스위스·벨기에·노르웨이·스페인 등 4개국에만 부유세가 남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부유세 도입에 대해 “사회주의”라며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은 국가의 강압과 지배가 아닌 자유와 독립에 기반해 건국된 나라로, 앞으로도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