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⑥ 매화향 따라 떠난 지리산 둘레길
by트립in팀 기자
2019.03.14 15:13:44
지리산 둘레길의 매화꽃
향기로운 매화꽃 띄운 막걸리 한 잔
알프스 하동 먹점골 매화 향기
[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확인을 안 한 게 낭패였다. 서울에서 밤늦게 출발한 버스는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경남 하동에 도착했다. 경험치를 적용해 버스터미널 위에 있는 찜질방으로 올라갔더니 영업을 안 한 지 오래였다. 혼자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테지만 여럿이 움직이는 상황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 모습이 당황스러웠는지 형님 한 분이 일단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생각하잔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눈치도 없는 내 뱃속은 눈을 뜨고 있다는 이유로 꼬르륵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나.
핸드폰을 꺼내어 위성 지도를 확인하면서 전날 미리 내려온 일행들과 아침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터미널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말씀드리고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둠에 잠긴 시골은 단어처럼 새까맸다. 이곳 지리에 익숙하신 기사님은 동정호 근처에 내려주시면서 ‘어디 어디서 머물러라...’라고 꿀 팁까지 알려주셨다. 어둠이 눈에 익으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정자 하나가 보였다. 지붕이 있는 곳이니 텐트를 펼치기보다는 매트와 침낭만 꺼내어 잠 속에 빠져들기를 몇 시간.
해가 떠오르려는지 머리꼭지에 스치는 한기에 잠이 홀딱 달아났다. 몸을 일으키니 몇 시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 능선을 보며 오늘 걸어야 할 길들을 가늠해 본다. 배낭을 패킹 후 근처 공원으로 이동하는데 동행한 형은 아침부터 흥이 났는지 배낭에서 뭔가를 꺼낸다. 고기와 벚꽃 잎이 그려진 맥주 한 캔이다. 뭐라고 폭풍 잔소리를 할 새도 없이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려놓고는 어디서 따왔는지 매화꽃을 하나, 두울, 셋...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또 기가 막힌 것인지 낭만적인지. ‘매화꽃 놀이하러 왔는데 매화꽃을 얹어서 먹어야 진정한 꽃놀이’라는 것이다.
그랬다. 이 봄에 걷는 지리산 둘레길은 ‘매화꽃 놀이’가 목적이었다. 눈이 유난히 없던 지난겨울. 그래도 겨울이라고 날씨는 미세먼지와 우중충함의 연속이었다. 달력의 숫자가 봄이 되는 3이 돌아왔고, 남쪽에서는 꽃 소식이 들렸다. 그 소식에 이끌려 우리는 꽃을 따라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꽃을 따라가는 발걸음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인 일이냐며 이번 모임을 궁리하면서 나는 혼자 키득대고 즐거워했다. 하루 먼저 도착한 길벗들을 만났다. 악양 들판을 가로질러 평사리 부부송으로 향한다. 멀리서 보면 푸른 잔디밭처럼 보이는 매화나무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했다. 이즈음의 부부송은 매화꽃에 둘러싸여 잠시 동안 소나무 향을 잊는다.
대축-삼화실 구간을 걷는 우리들은 이 구간의 시작점인 대축마을에 들어섰다. 한 번 와본 곳이라도 마을 초입이 익숙하다. 길벗이 마을 점방에서 막걸리 2병을 사서 배낭에 꽂는 걸 잊지 않는다. 대축마을이 있는 축지마을은 대봉시가 유명한 곳으로 지난봄에는 온통 감꽃 천지였는데 이 봄에는 매화꽃이 마을을 감쌌다. 마을 초입부터 매화향에 취해 걸음이 갈지자가 되었다. 마을의 자랑이자 천연기념물인 문암송까지 오르는 길은 내내 만개한 매화꽃의 환한 기운을 받았다. 길가 양쪽으로 흐드러진 매화꽃을 보며 걷는 걸음은 매화향을 맡으려고 콧구멍 벌렁대며 킁킁대기를 여러 번.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지만, 누구도 내게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나보다 빨리 걷는 그들도 나처럼 콧구멍을 벌렁거렸으니까.
오르던 길이 힘들면 뒤를 돌아 악양 들판과 형제봉 능선을 본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초미세먼지는 아름다운 섬진강도 멋스러운 산자락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햇빛 좋은 길가 한쪽에서는 멋과 맛이 어우러진 술상이 만들어졌다. 땅바닥이 상이 되는 길 위의 즐거움. 길벗이 사온 막걸리가 각자의 컵에서 매화향을 피워냈다. 잔을 입에 대니 막걸리의 시금털털한 걸걸함이 달달하고 향기로운 매화향에 졌지 뭔가. 세상 어느 술이 이보다 더 달달할 수 있을까. 미세먼지로 흐릿한 풍경의 아쉬움은 입과 코의 향기로움으로 잊는다.
하루 걸을 거리를 이틀에 나눠 걷는 거리이니 길 위에서 여유와 낭만을 다 만끽하고 누려도 괜찮으리라. 먹점재부터 하얗게 빛나던 매화꽃은 먹점마을로 내려서면서부터는 마음마저 잔잔한 일렁임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늘 걸음의 마지막인 곳이다. 구재봉 중턱 해발 400m 산골에 있는 먹점마을의 매화는 화려하지 않다. 이곳의 매화나무는 매실을 수확하기 위해 전지를 하는 탓에 키가 작지만 나무 사이의 간격이 넓어 눈높이에 맞춰 매화꽃을 즐길 수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과 하동은 매화를 즐기는 방법이 참 많이 다르다. 광양의 매화꽃이 화려한 비단과 같다면 먹점마을의 매화는 목화솜처럼 보드랍고, 수수하다. 보여주는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더 선호해서인지 내 눈에도 길벗들의 눈에도 이곳의 풍경이 주는 잔잔함이 참 좋다고 한다.
유유자적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먹점마을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매실 농장에 연락을 드려 숙영지를 정했다. 농원까지 400m. 다시 재에 오른다고 할 정도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걸음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규모가 상당한 이곳 농원에서 숙영지는 특별히 정해진 곳이 없다며 손님이 체크인 한 숙소 건물 외에 본인이 치고 싶은 곳에 텐트를 치라고 말씀해 주신다. 게다가 감 말랭이, 매실 말랭이, 황금차까지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을 맛보라고 내어주시기까지 하시니 길 위의 호사도 이른 호사가 없다. 사장님의 배려로 매화나무 아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치는 동안에도 매화향이 바람에 날려 코끝을 간질였다.
농원 맞은편 백운산 자락 위에 있던 해가 길게 붉은 기운을 내리며 제집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 취한 매화향이 어둠이 내린다 한들 사라질까. 먹점마을에서의 웃음 꽃밭이었던 저녁. 약속한 시간이 되자 우리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밤새 잠자리에서 누구는 보물을 찾겠다고 매화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을 것이고, 누구는 매화의 달콤함에 코를 벌름거렸을 것이다.
봄, 사계절 중 제일 어여쁜 이름 아니던가. 이 부드러운 단어는 칙칙한 중년 아저씨들도 꽃 중년으로 만들고, 내쉬는 숨 한끝마다 생명을 불어 넣는 힘이 있다. 발걸음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코끝으로 스치던 진한 매화향을 따라 걸었던 길. 온 세상이 외치는 봄이라는 계절에 우리는 더 특별한 봄맞이를 했다. 어쩌면 먼 훗날. 허리가 구부러지고 다리 힘이 없어 걷지 못하는 시간이 왔을 때 말이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앉아 과거의 시간들을 얘기할 때면 ‘그해 봄에 매화향에 취해 봄과 놀았다’라는 것을 잊지는 않겠지. 젊은 시절 한 자락이나마 한량이 되어 즐기던 꽃놀이 추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