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⑫ 누군가 알려준 비밀 숲의 로그

by트립in팀 기자
2020.06.08 15:21:51

누군가의 기억으로 찾았던 숨은 박지
잣나무와 활엽수의 공존
생각보다 어려웠던 비화식 백패킹

[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잣나무 숲에서의 하룻밤은 늘 옳았다. 비슷하게 생긴 소나무 숲은 나무숲이 짙으면 음의 기운이 넘치는 데 반해 잣나무는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런데 또 웃기는 건 무언가 알 수 없는 미는 저항력이 있다. 그 때가 몇 년 전이었을까. 잣나무 숲을 처음 갔을 때는 이게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구분하는 눈이 없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무는 모두 초록이고, 꽃은 모두 빨강과 노랑 그리고 분홍일 뿐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같이 다니는 친구들보다 나무 이름을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으니 초창기 때를 생각하면 엄청 자란 셈이다.

수도권의 잣나무 숲이 무분별한 사람들 때문에 점점 막히고 있는 요즘, 하루 저녁을 숲에서 온전하게 보내려면 새로운 곳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진 숲은 많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가 화두인 요즘 잣나무 숲 중 비대면이 가능한 곳을 찾는 것은 만만치가 않다. 그런 와중에 친한 길 친구 몇몇은 비밀 박지를 서로가 공유하게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오랜만에 옛 기억으로 가겠다며 그만의 아지트로 안내했다. 우연인지 같이 한 일행들 모두 주말 오전에 볼일을 봐야 했던 상황이어서 수도권의 그 숲은 우리에게 무진장 환영을 받는 숲이 되었다.

명확한 들머리도, 말머리도 없는 곳. 누군가의 감으로 찾아가야 하는 그곳은 숲에 들어선 후 걸었다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의 걸음에서 이미 원시림을 느꼈다. 쫄쫄쫄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리저리 건너야 하는 곳이지만 지난겨울 인제 마장 터를 갔을 때의 계곡보다 더 좁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 길섶은 고비 등이 자랐다. 계곡 상류를 따라 자라는 활엽수는 마치 제주 곶자왈 숲에 들어선 것처럼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갔다. 문득 고개를 젖히니 짙은 나뭇잎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듬성듬성 보였다. 다행이다. 햇빛 아래 있어도 땀이 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었는데 천고 높은 집처럼 숲이 높아 그 사이로 부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분명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동물들이 다니는 길처럼 희미하다. 걸음을 멈추고 눈으로 흔적을 따라가 보니 그제야 높은 나무 숲 아래 융단을 깔 듯 펼쳐진 숲이 제대로 보였다. 좁은 계곡에는 지난해 가을에 떨어져 수북이 쌓인 낙엽이 여태 썩거나 흐르지 않고 계곡 바위 위에 그대로 덮은 채 시간이 멈췄다. 부러진 나무 기둥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자연으로 돌아가며 이정표 역할을 한다. 그것뿐일까. 부러진 나뭇가지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숱하게 보는 풍경이다. 누군가 일부러 자르지 않았다. 나무가 그리고 숲이 자신을 떨구며 그들만의 로그를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목적했던 잣나무 숲에 들어서며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숲이 있는 산은 제법 유명한 곳으로 그 산 어딘가에 이런 비밀의 숲이 있을 거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활엽수 사이의 잣나무 숲은 이미 사람들이 머물면서 다져 놓은 계단식으로 조성한 쉼터였다. 사람들이 오간 흔적이 거의 없는 길 아닌 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이런 풍경을 보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각자 하루 저녁 집을 짓고 나니 각자만의 방식으로 숲을 기록하는 중에 핸드폰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것을 알았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 곳. 이내 배터리 닳을까 싶어 비행기 모드로 놓고 잠깐은 문명 세계와의 차단이다.

이번 백패킹의 화두는 비화식이다. 여름이 코앞이라 숲에서 불을 쓰는 것이 심적으로 불편했던 것이다. ‘화식에 익숙한 우리가 과연 비화식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었지만 준비한 음식을 펼쳐 놓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먹거리가 풍성해서 놀랐다. 그런데 이 음식들을 가져오면서 보니 생각보다 짐의 부피가 있었고, 배낭도 제법 묵직했다. 국물이 있는 음식을 싸서 다녔으면서도 뜨거운 물을 담아온 보온병이 무거웠고, 비닐 봉투 대신 플라스틱 용기에 음식물을 넣어 오면서 부피가 크다고 생각됐다.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 이게 백패킹을 하는 우리의 민낯이었다.

불을 쓰고, 조리하는 시간이 없어지니 숲의 로그에 더 충실하게 되었다. 이슬이 내릴까 싶어 쳐 놓은 타프 위로 또록또록 숲의 배설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무가 서로에게 속삭이며 끼익 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저 멀리 푸르게 보이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숲의 소리는 확연히 달라졌다. 소프라노 같았던 한낮의 청량감은 굵고 안정된 베이스의 음량으로 바뀌더니 이내 아이의 엉덩이 토닥이며 야트막하게 불러주는 자장가가 흐르듯 편안한 기운이 돌았다. 마치 숲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이 깰까봐 우리의 오가는 소리도 당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환경적인 동물이라고 했던가.

계곡의 아침은 새들의 울음소리로 시작되었다. 비화식으로 하루 저녁을 보낸 덕분에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들이 평소의 1/2도 되지 않는다. 원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음식을 적게 가지고 다니는 멤버들인데 비화식은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저녁 충분히 만찬을 즐겼고, 즐거웠다. 각자 가져온 것에서 나온 쓰레기는 각자 챙기며, 서로를 칭찬하는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쩌면 당연했던 숲의 로그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너무 편리한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시작은 불편하고 어색하고 당황스럽지만, 경험이 탑 올리듯 한 번씩 늘면 언젠가는 비화식도 익숙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