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프리즘]"토지보상 업무는 내가 잘알지"…전직 LH 간부의 일탈

by정재훈 기자
2021.08.04 16:15:42

퇴직해 2016년부터 보상서류 작성 도맡아
'LH 근무 당시 보상업무 전담' 내세워 접근
토지주에게 평균 150만원 1500만원도 받아
경찰, 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송치

[이데일리 정재훈 기자] ‘나이 예순, 퇴직하고 나니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일했던 곳은 대한민국의 주택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다. 더욱이 나는 그곳에서 토지보상 업무만 20년 동안 했던 했던 전문가가 아닌가. 그렇다. LH를 상대로 보상을 받아야 하는 토지주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상을 받도록 도와주면 돈벌이가 되겠다.’

2008년 차장 직책으로 LH를 떠난 60대 A씨가 퇴직후 가진 생각이다. 끝내 A씨는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로 결심했고 2016년부터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된 곳을 자신의 돈벌이 터전으로 삼았다. A씨는 자신을 LH에 근무했던 전직 간부라고 대놓고 소개하면서 높은 값에 토지보상을 받기 위해 구성된 주민대책위 관계자나 토지주들에게 접근했다.

A씨의 업무 개요도.(그래픽=경기북부경찰청 제공)
토지보상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작성해주고 어떻게 하면 보상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팁도 제공해줬다.

조금이라도 보상을 더 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토지주들에게 이런 행정업무를 대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 소유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A씨가 가진 LH라는 배경에 더욱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것이 토지주들의 마음이었다.

A씨는 자신의 배경을 믿고 보상의 모든 절차를 맡긴 토지주들의 비닐하우스 규모나 쓰레기장 크기, 나무가 어디에 심어져 있는지 등에 관해 보상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류를 작성했다. 또 대책위 간부들과 접촉해서 ‘권리금 보장 등 요구 조건 불응 시 사업 진행에 협조하지 않겠다’, ‘사업시행자 측 감정평가법인 2곳 중 1곳을 제외시켜 달라’는 등 높은 보상가 책정을 위해 토지주들이 사업시행자에게 요구해야 하는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이에 대한 대가로 A씨는 토지주 1인당 평균 150만 원의 비용을 받았다. 많게는 1500만 원까지 A씨에게 지불한 토지주도 있었다.
A씨가 실제 작성한 보상 서류.(자료=경기북부경찰청 제공)


하지만 토지주들은 A씨가 이같은 서류를 작성해 주기 위해 필요한 변호사나 행정사 등 전문 자격증이 없었던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A씨는 무자격 행위로 경찰의 이번 수사에 덜미가 잡혔다.

경기북부경찰청 부동산 투기사범 특별수사대는 2016년부터 올해 초까지 경기 남양주 왕숙지구와 하남 교산지구, 성남 금토지구 등 LH와 경기주택도시공사가 시행하는 수도권 공공주택사업 예정지 13곳에서 토지·건물·시설 등의 수용 대상자 93명으로부터 보상 협의 관련 서류를 꾸며주는 등의 대가로 1억5000만 원을 받은 혐의(변호사법 위반 등)로 A(60)씨를 구속했다고 4일 밝혔다.

경찰은 “전국의 거의 모든 택지개발 예정 지역은 LH 출신 직원들은 물론 무자격자들이 보상업무 대행을 통해 수익을 노리는 브로커로서 활동하고 있다”며 “이런 범죄 혐의가 드러날 경우 사업시행자들이 조금 더 꼼꼼하게 보상업무를 처리해 국가 예산의 잘못된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