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음식 냉면, 대한민국 여름 입맛을 점령하다[이우석의 食史]
by강경록 기자
2024.07.09 18:32:00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 소장] 갑자기 더워지니 냉면집 문마다 손님 줄로 똬리를 튼다. 올해 유난히 덥다고 예고된 여름이니 냉면 한 그릇에 기대는 마음이야 저마다 오죽할까.
원래는 한겨울 한파 속에 먹는 음식이 냉면이다. 구들장에 군불을 때고 이불을 둘러업고 살얼음 낀 동치미에 말아낸 국수를 먹던 것이 우리나라 냉면 문화다. 가게마다 다르겠지만 냉면의 기본 구성요소는 면과 육수다. 전분을 쓰는 함흥냉면(농마국수)을 예외로 치고, 냉면 면발은 메밀이 기본이다. 밀은 귀했으니 메밀로 국수를 뽑았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기억한다면 메밀이 언제 영글고 수확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여름 저물어 꽃이 피니, 일러야 가을 초입이다. 국내 최대 메밀 재배지인 제주에서는 11월 중순이나 돼야 수확할 수 있다.
◇냉면, 한식 문화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다
먹을 게 늘 모자라던 시절, 가을에 수확한 메밀을 이듬해 여름까지 남겨둔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늦가을에 거둬 갈아낸 메밀가루를 겨울에 두고두고 먹었다. ‘여름 냉면’은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였다. 국물은 더욱 그렇다. 동치미를 담가놔야 냉면을 말아먹을 수 있다. 여름 동치미라니. 담그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최 무가 맛을 내지 못한다. 동치미는 단맛이 제대로 든 ‘월동무’를 쓰는게 맞다. 육수에 썼다는 꿩도 마찬가지다. 꿩은 보통 겨울 농한기에 눈이 소복이 내린 날 잡는다.
하지만 뜨거운 날 잃어버린 입맛에 냉면을 찾게되는 것은 한국인의 인지상정이다. 시내 유명 면옥(麵屋)을 가보면 늘 문전성시다. 겨울 음식 냉면이 여름 입맛을 점령했다. 요즘같은 날 손대기에도 오싹한 냉면 대접을 받아들면 누구나 싱글벙글이다. 차가운 육수에 담긴 짱짱한 국수를 쪼록 빨아들이고 나면 당장 ‘쩡’한 한기를 느낀다.
냉면은 한식 문화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음식이다. 세계적으로도 낯선 방식의 이 차가운 국수는 이제 대한민국의 문화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상징하는 음식이 됐다. 특히 남북 관계나 통일에 대한 이슈가 발생하면 냉면이 화제에 슬그머니 한 젓가락을 올린다.
지역과 산물의 환경에 따라 발생하는 음식의 기원이 모두 그렇듯, 냉면의 역사야 무척 오래겠지만 문헌상으로는 조선 시대에 언급된다. 원래 이름은 그냥 국수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평양과 함흥, 진주 지역의 것을 따로 냉면이라 불렀다. 조선 말 동국세시기에 냉면에 대한 대목이 나온다.
1849년에 홍석모가 저술한 조선 후기 생활서 동국세시기는 당대 여러 풍습에 대해 기술한 책으로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냉면은 겨울 계절 음식으로 평양이 으뜸’이라며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다’고 썼다.
“평양 사람이 타향에 가 있을 때 문득문득 평양을 그립게 하는 한 힘이 있으니, 이것은 겨울의 냉면 맛이다. (중략) 꽁꽁 언 김치죽을 뚫고 살얼음이 뜬 김장 김칫국에다 한 저 두 저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이요! 상상이 어떻소!” 김소저가 1929년 잡지 별건곤(別乾坤)에 기고한 ‘사시명물 평양냉면’의 구절이다.
평양냉면은 일제 강점기에 인천과 경성(서울)에 알려졌으며 특히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온 피란민들이 남쪽 곳곳에 냉면집을 차리며 널리 퍼지게 됐다.
지금이야 평양냉면이 인기가 많지만 사실 냉면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육수와 양념을 쓰는 방식으로 분류하자면 물냉면과 비빔냉면이 있다. 물냉면은 이름처럼 차가운 육수에 말아낸 국수로 일반적인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 이에 해당한다.
비빔냉면은 얼얼하니 매운 고추장 소스에 비벼 먹는 국수인데 대표적으로는 함흥냉면을 비롯해 다양한 냉면과 냉국수류가 있다.
피란민과 원조 밀가루가 부산에서 만나 생겨난 밀면도, 잘못 만들어져 더욱 인기를 끈다는 쫄면도 사실 ‘차가운 국수’이니 냉면의 범주에 든다. 협의(狹義)로 냉면을 따로 구분할 뿐이다.
요즘 냉면은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리 자극적이지 않은데다 시원한 맛에 길들여지면 계속 냉면을 찾게되는 이유다.
◇지역색 품은 각기 다른 냉면, 입맛을 사로잡다
매운맛을 좋아하는 이들은 함흥냉면을 찾는다. 얇은 면발을 얼얼한 양념에 비벼 쪼로록 빨아들이면 바로 정수리까지 저릿저릿해지는 화끈한 맛에 반색한다. 메밀을 쓰지 않았는데도 냉면이라 부른다. 원래는 함경도 현지에서 ‘농마국수’라 불렀다. 농마는 녹말을 뜻한다. 감자 전분으로 만든 까닭이다. 전란을 피해 속초와 서울, 부산 등으로 내려온 다음 맛이 바뀌었다. 개마고원 감자가 없으니 남쪽에서 구하기 좋은 고구마 전분을 쓰거나 아예 밀가루로 밀면을 만들었다.
생선 말리기에 ‘선수급’였던 함흥, 흥남 사람들이 서울 중부시장 자리에 모여들었다. 국내 최대 건어물 시장인 중부시장이 이렇게 생겨났다. 동향이지만 건어물 장사를 하지 않는 이들은 바로 옆 오장동에 냉면집을 차렸다. 오장동 함흥냉면 골목은 함경도 출신들의 사랑방이 됐다.
한반도 동부는 매운맛의 벨트가 형성되어 있다. 함경도나 경상도는 매운맛을 선호한다. 매콤한 함흥냉면에는 주로 명태회를 얹었으나 이도 구하기 어려워 간재미회를 얹어 팔았다. 함흥식에서 조끔 달라진 서울식 회냉면이 탄생했다.
냉면 얘기에 진주냉면이 빠지면 섭섭하다. 양반 많던 영남의 중심고을 진주에는 서북의 평양과 맞먹는 외식문화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예전 레시피는 사라졌으나(모든 것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요즘의 진주냉면이 살아남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조개, 건어물 등 해물 육수에 달군 쇳덩이를 넣어 잡내를 잡아내고 면 위에 고명을 듬뿍 올려 먹는 방식이 진주냉면의 정형으로 굳었다.
잘 부쳐낸 진주 육전이 한가득 올라간 것이 특징이다. ‘수돗물’이란 평이 있을 정도로 슴슴한 평양냉면에 비해 국물이 다소 진한 편이지만 해물 육수라 느끼하지 않고 깔끔한 뒷맛이다.
달걀 지단 등 손이 많이 가는 고명을 얹은 것이 과연 양반이 화려한 기생집에서 먹던 별미였다는 명성을 뒷받침한다.
땡볕 사나운 유월, 시원한 냉면으로도 견딜 수 없는 무더위가 몰려오기 전에 얼른 미리 몸을 식혀놓는 게 좋을 듯하다.
◇냉면 맛집
▶경인면옥 = 원래 광복 전 1944년 서울 종로통에서 창업했다고 하니 무려 80년이다. 1946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틀고 인천 냉면의 맹주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집이다. 동치미만 쓴 본래의 평양냉면과 달리 고기가 풍족했던 인천에서 진화한 고기 육수 평양냉면이다. 간은 슴슴하지만 육향은 짙다. 여기다 시원한 맛을 더하는 동치미의 적절한 배합이 이 집 맛의 비결이다. 메밀향을 품은 면발도 좋다. 불고기와 녹두전, 만두 등 이북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인천 중구 신포로46번길 38.
▶진미평양냉면 = 일명 ‘강남냉면’의 인기를 주도하고 있는 집. 시내 유명 냉면 노포 주방에서 근무한 셰프가 각 메뉴의 장점을 모아 차린 집이다. 얇지만 씹을수록 메밀 향을 끝까지 풍기는 면발에다 육향을 숨긴 투명한 이른바 ‘수돗물’ 육수, 진한 맛을 뿜는 수육과 계란, 무, 오이 등을 올린 꾸미까지 21세기 개업 냉면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내공이 있다. 특히 가슴이 뻥 뚫릴 정도의 시원한 국물이 인기라 사방에서 ‘냉면 해장파’가 몰려든다. 서울 강남구 학동로 305-3..
▶부원면옥 = 남대문시장의 ‘시장냉면’. 서울 시내 평양냉면집 중 가장 저렴한 가격대다. 개업 연수도 반세기를 넘었다. 약간은 낯설게도 뽀얀 국물에 굵은 면을 말고, 꽤 두툼한 돼지 수육을 올려준다. 달달한 동치미와 구수한 육수에 씹는 맛 좋은 면발을 똬리 틀어넣은 냉면은 맛도 좋고 푸짐하다. ‘시장냉면’답게 꾸미 인심이 좋다. 냉면만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매콤새콤한 닭무침도 물리칠 재간이 없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4길 41-6 부원상가 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