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유산' 남산 힐튼호텔…설계자 김종성 건축가가 바라는 개발 그림은

by김성수 기자
2023.04.27 16:04:25

"호텔 알루미늄 외벽·아트리움 보존해야…새 건물과 연결"
"유럽 공중권 도입해 서울스퀘어 23→30여층으로 높여야"
"힐튼·메트로·서울로·남산그린 통합개발…양동지구 큰 그림"
"서울역 대로 지하화, 언젠간 해야…남대문경찰서 이전도"

[이데일리 김성수 기자] “서울스퀘어가 지금 23층보다 더 높아져야 해요. 힐튼호텔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도 문제없어요. 양동 재개발 구역 전체를 볼 때 높은 건물과 낮은 건물이 조화롭게 섞여야 입체적 디자인 구성이 나오거든요. 국제적 대도시 서울에 대한 장기적 비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국 현대건축가 1세대’ 김종성 서울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명예대표는 17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밀레니엄 힐튼 서울(힐튼호텔)의 내부는 보존하되 서울역 일대 ‘큰 그림’에 맞게 개발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김종성 건축가 (사진=김태형 기자)
40년간 남산 자락을 지켜온 서울 중구 힐튼호텔. 김 건축가가 처음 설계한 호텔이자 인생에 ‘한 획’을 긋게 한 건물이다. 그는 이 호텔 설계를 의뢰했던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우중 회장이) 나하고 면담 한번 하더니 호텔 지을 생각이 있냐고 하더라고. 그 분은 상대방하고 같이 일하면 될지, 안 될지를 금방 결론내리는 사람이에요. 난 호텔은 해본 적 없었지만 백지에서 시작한 건 아니었지. 지금 부영이 갖고 있는 소공동 땅이 당시 효성 거였거든. 효성이 거기에 호텔을 지을지 계획해달라고 해서 나도 (호텔 설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 상태였지.”

김 건축가는 미국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 교수 직도 내려놓을 정도로 힐튼호텔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힐튼호텔은 한국 정치사의 굵직한 협상 무대로 활용되면서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등극했다.

현재 이지스자산운용은 현대건설과 함께 힐튼호텔을 철거하고 인근 메트로타워, 서울로타워와 시너지가 나게끔 개발할 계획이다. ‘분신’과도 같은 건물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김 건축가는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호텔에서 건축·문화적 가치가 있는 부분은 유지하면서도 개발업체의 재산권은 훼손하지 않는 대안이다.

힐튼호텔 (자료=김종성 건축가)
김 건축가가 보존을 원한 곳들은 크게 두 곳이다. 첫 번째는 알루미늄 소재로 된 ‘커튼월 외벽’이다. 당시 국내 호텔의 90%는 외벽이 ‘콘크리트 판넬’이었다. 하지만 김 건축가는 국제사회에서 선호되던 알루미늄 외벽을 도입하는 혁신적 시도를 했다.

다른 하나는 브론즈·대리석 등 3~4가지 재료로 마감한 ‘아트리움’ 공간이다. 아트리움이란 현대 건축에서 지붕이나 벽을 유리로 만든 실내 공간을 뜻한다. 건물 내부에 아트리움이 있으면 햇빛이 잘 들어서 옥외 광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힐튼호텔의 ‘아트리움’을 보면 당시 지어진 건축물에 비해 천장고가 높다. 아래층 바닥에서 2층 꼭대기까지 높이가 18m에 이른다.

“객실 1000실짜리 롯데호텔도 천장이 생각보다 높지 않거든요. 반면 힐튼호텔은 천장이 높아서 답답하지 않고 시원해 보이죠. 돈을 버는 공간이 아니라 대중(퍼블릭)을 위한 공간인 겁니다. 내가 보존을 원하는 ‘내부 공간’을 전부 개방해서 새로 지어질 건축물 로비와 서로 연결하면 됩니다.”

만약 보존된 힐튼호텔 옆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 자칫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는 일본 사례를 들며 문제 없다고 설명했다. “도쿄 미드타운 업무시설과 리테일 시설은 인접한 건물과 외벽 디자인이 달라도 이질감이 없어요. 메인 로비가 다른 재료로 구성돼도 하나의 도시를 구성하는 표면재료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힐튼호텔 로비를 보존해도) 이질적일 가능성은 ‘제로’예요.”

김종성 건축가는 이지스자산운용이 힐튼호텔과 메트로타워, 서울로타워 건물을 통합 개발하는 것에 ‘대찬성’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개별 건축물 단위로만 개발해선 안 되고 양동 재개발 구역의 ‘큰 그림’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 건물 뿐만 아니라 인근 SK남산그린빌딩과 서울스퀘어, 남대문경찰서, 서울역 일대 대로변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는 이를 위해 유럽 등 외국에서 보편화된 ‘공중권’(air right) 도입이 필요하다고 소개했다.

‘공중권’이란 특정 땅의 용적률이 활용되지 않았을 경우 법규상 허용범위 내 있는 다른 땅 주인이 그 용적률을 매입할 수 있는 제도다. 예컨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성당은 층수가 1층이고 용적률은 20%밖에 안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만약 성당이 중심상업지구에 있으면 유럽의 경우 용적률 1200%까지 개발할 수 있는데 성당이라서 용적률을 20%밖에 못 쓴다. 이 경우 나머지 용적률 1180%를 법적 허용범위 내 있는 다른 땅 주인이 매입할 수 있다.

힐튼호텔 인근에 공중권 도입이 필요한 이유는 개별 건물의 면적이 작아서 용적률을 최대한으로 활용해도 ‘랜드마크’ 건물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울로타워, 메트로타워는 허용용적률 800%로 지어도 개발하면 18층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미래의 서울을 생각하면 그 지역은 18층 건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게 김 건축가의 생각이다.

“(힐튼호텔, 서울로타워, 메트로타워를) 통합 개발하는 것에 100% 찬성입니다. 근데 SK남산그린빌딩도 같이 묶어 개발해야 도시설계 관점에서 균형이 맞아요. 그러려면 서울시가 땅 주인의 공중권을 인정해줘야 해요.

현재 서울스퀘어는 지상 23층인데, 더 높아져야 합니다. 적어도 30여층은 돼야 해요. 인접한 다른 땅의 공중권을 합리적 가격에 사서 서울스퀘어에 보내는 거죠. 양동지구 안에는 쪽방촌 등 공중권을 팔 만한 부지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면 서울스퀘어는 서울역 앞 관문으로서 36층짜리 손색 없는 건물이 됩니다.”

그는 남산·성곽 등 경관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제한’ 문제도 문화재청이 규제를 유연하게 적용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힐튼호텔 바로 앞에는 한양도성 성곽과 남산이 있다. 사대문 안의 국가지정 문화재 주변 건축물은 높이기준인 앙각(올려다보는 각)을 맞춰야 한다.



“역사 문화재를 가리지 않기 위해 ‘앙각’이라는 고도제한이 있는데 이걸 문화재청이 20%까지 완화해준 사례가 있거든요. 힐튼호텔 서쪽에서 서울스퀘어까지 신축되는 부분은 높이 90m 규제가 적용되지만, 20% 완화하면 108m까지 가능해지는 거죠.”

서울스퀘어가 너무 높아지면 힐튼호텔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 않을까. 그는 이런 우려에 대해 ‘도시 디자인’ 측면에서 문제 없다고 일축했다.

“도시 디자인에는 변화, 대조가 있어야 합니다. ‘아이콘’ 역할을 하는 건물이 있으면 주변에 낮은 건물들도 몇 개 있어야 돼요. 낮은 건물들도 똑같은 높이가 아니라 어디는 높고, 어디는 낮은 식으로 입체적 구성이 돼야 하죠. 도시 디자인 관점에서 균형 잡힌 높이의 건물이 들어서도록 서울시가 장기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특히 김 건축가는 서울역 앞 대로변 지하화는 ‘숙명’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도쿄 등 국제적 대도시의 철도 종착역 앞은 대부분 도보로 횡단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역도 언젠가는 도로를 지하화해서 지상에 공원부지를 조성하고, 서울스퀘어 4층과 힐튼호텔 로비까지 대중에게 개방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본 도쿄역 마루노우치 쪽 역사 (사진=도쿄역 페이스북)
그는 과학적으로 공사 관리하는 기법이 크게 발전해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8차선 도로 중 4차선은 그대로 유지하고, 나머지 4차선을 지하화하는 공사를 먼저 진행하는 것이다. 공사가 끝나면 다시 나머지 4차선 공사를 진행한다.

물론 이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초대형 공사가 불가피하고, 교통난이 심각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서울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고 봤다.

“(지하화로 겪는 교통난은) 다른 세계적 대도시들이 다 한 번씩 겪는 홍역이에요. 뉴욕 펜실베니아역이 새로 탄생하기 위해서 옛날 우체국 건물에 유리 지붕을 씌우고 기차가 아래로 들어오게 했거든. 뉴욕 시내는 한 4년 정도 정체됐지만, 그 4년의 희생 덕분에 지금은 얼마나 자랑거리가 됐는지.

서울역 앞 지하화 공사도 우리 시민들이 몇 년은 겪어야할 고통이 될 거에요. 하지만 누가 해를 입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좋은 사업이에요. 언젠가는 해야 합니다.”

김 건축가는 남대문경찰서가 서울역 앞 전면에 있는 것보다 후암동 뒤쪽에 들어가는 것이 도시계획 관점에서 어울린다고 조언했다. “50년 후 재개발되는 양동지구의 비전을 생각하면 남대문경찰서가 서울역 앞을 차지하는 건 부자연스러워요. 양동 재개발 지구의 다른 곳에 새로운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후암동 길이라든지. 경찰이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도록요.”

김종성 건축가의 주요 작품은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울시내 건물만 꼽아도 남산 힐튼호텔, 아트선재센터, 서울역사박물관, 서린동 SK빌딩,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서울로타워(구 대우재단 빌딩), 서울대박물관, 우리금융아트홀(구 88올림픽 역도경기장) 등 즐비하다.

그에게 힐튼호텔 외에 가장 애착이 가는 건물이 뭘까. 그는 주저없이 ‘SK서린빌딩’과 ‘서울역사박물관’을 꼽았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사진=SK)
“오피스 빌딩을 하나만 꼽으면 당연 SK서린빌딩이죠. 내가 설계한 18층짜리 오피스 빌딩은 여럿이지만, 36층짜리는 그거 하나밖에 없거든요. 디자인도 제일 자랑스럽구요. 실사용 면적에 비해 부대면적의 효율이 아주 높죠.

다른 하나는 서울 역사박물관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경험을 다 담은 땅이죠. 그 자리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 정부 관계자 자녀들을 교육하는 경성중학교가 있었는데 역사박물관이 들어선 거에요.

공사 도중에 유구(옛날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가 나와서 남겨놓다 보니 건물이 ‘디귿자’가 됐습니다. 규모가 2만㎡인데, 서울시내 그 정도 규모 문화시설은 많지 않죠. 그래서 굉장히 애착이 갑니다.”

‘국내 현대건축 1세대’인 김 건축가를 기념하는 건물을 세운다면 어떤 스타일을 원할지 궁금했다. 글로 기억할 수도 있지만 건물로 기억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는 기념관을 짓는 시대가 아니다”며 웃음지었다.

“내 도면, 작업물들은 과천 현대미술관에 전부 기증했어요. 목천문화재단은 나 포함한 건축가들 인터뷰 기록을 담은 구술집(대화록)을 만들었구요. 그걸로 됐죠. 다만 길 가다 누구나 들를 수 있는 정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구술집을 여러 부 갖다놓고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는 거죠. 모니터에 띄울 영상도 만들구요. 수익이 생기면 들어온 사람한테 음료도 제공하구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종성 건축가 (사진=김태형 기자)
△1935년 출생 △경기고등학교 졸업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 학사 △일리노이공과대학 대학원 건축학 석사 △미스반데어로에 건축연구소 근무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 플래닝 앤 디자인 학장 △서울건축종합건축사 사무소 대표 △한국건축문화대상 입선(아트 선재센터) △한국건축가협회상(SK빌딩) △파라다이스상 심사위원 △제1회 한국건축가협회 골드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