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달린 경주마 ‘사료’ 활용한다는 비윤리적 발상[헬프! 애니멀]

by김화빈 기자
2023.02.27 16:55:55

식용 금지 약물 투여된 퇴역 경주마 도축…관리 부실 적발
퇴역 경주마 펫 사료화 추진하다 동물 단체 반발로 좌초
"당국, 사행 산업에 이용된 퇴역 동물 복지도 책임져야"

[이데일리 김화빈 기자] 지난 2019년 10월 미국 동물보호단체 페타(PETA)가 폭로한 한 영상이 한국을 발칵 뒤집어 놨다. 부상 등의 이유로 퇴역한 경주마들이 경제성을 이유로 곧장 제주도 도축장으로 직행해 무차별 폭행을 당한 뒤 잔인하게 도살되는 모습이 공개된 것이다. 영상 속 도축장에선 다른 말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한 것을 보고 뒷걸음질치는 말의 모습, 한쪽 다리가 묶여 거꾸로 들어 올려지는 말의 모습이 그대로 공개됐다. 퇴역 경주마의 비윤리적 도축 문제가 폭로된 지 약 4년이 흘렀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퇴역 경주마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당국과 이에 반대하는 동물 단체들의 주장이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제주 도축장에 끌려온 퇴역 경주마가 도살 직전 학대 당하는 모습 (사진=PETA)
27일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검역본부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도축된 퇴역 경주마는 7470마리에 이른다. 지난해에는 7월까지 876마리가 도축됐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최근 5년 간 페닐부타존, 아미카신 등 식용 금지 약물이 투여된 경주마가 무분별하게 도축돼 육포 등으로 수출되거나 가공용으로 유통됐다는 점이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지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식용 금지 약물이 투여된 경주마가 448마리 도축됐으나 정작 어디로 유통됐는지는 알 수 없다. 경주마에 투여된 페닐부타존은 백혈병을 유발할 위험이 있으며 재생불량성빈혈, 구토, 쇼크를 야기할 수 있다. 현재 경주마에 투약되는 200여 종 약물 가운데 식용 금지 약물은 45종이다.

이 때문에 동물용 의약품 등의 안전 사용 기준은, 사용이 허가된 동물용 의약품을 용법·용량을 준수해 투약하더라도 대상 동물을 식용으로 유통할 시 인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일정 기간 투약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마사회 소속 동물병원들은 이 같은 관계 법령에도 불구하고 휴약(休藥) 기간이 존재하는 약품이 투여된 말의 소유주에게 휴약 기간을 통보하지 않았다.

감사원이 지난해 발간한 ‘한국마사회 정기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 간 제주에서 도축된 퇴역 경주마 640마리를 대상으로 휴약 기간 내 도축된 사례를 확인한 결과, 절반 이상인 355마리(55.6%)가 휴약 기간 이내에 도축·유통된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마 도축을 둘러싼 윤리 문제가 제기되는 가운데 마사회의 관리 부실까지 드러나자 일부 동물 단체들은 제주 경마공원부터 제주도 내 경주마 도축장까지 수십 차례 시가 행진을 하며 경주마 식용·도축 금지 법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다.마사회뿐 아니라 제주도 역시 퇴역 경주마의 경제적 처리 방안 연구 용역을 진행했다가 뭇매를 맞고 철회했다. 앞서 제주도는 제2차 말 산업 육성 5개년 종합 계획에 따라 지난 2021년 1월 ‘경주 퇴역마 펫(애완동물) 사료 제품 개발 연구 용역’을 진행, 2022년 반려동물 공장 건립 계획을 수립했다. 짧은 현역 주기에 과잉 생산된 퇴역 경주마 처치가 곤란하자 도축해 활용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충남 폐목장서 구조된 퇴역 경주마가 동물 단체에 의해 구조, 말 생추어리로 이송돼 보호되고 있다(사진=동물자유연대)
인간 유희를 위해 죽도록 뛴 경주마의 전 생애 복지 시스템 구축은 커녕 제주도가 마육(馬肉)산업 확대에 앞장서고 있는 셈이다. 제주도의 이 같은 대책은 마사회가 최근 밝힌 경마 산업 방침과도 어긋난다.

설립 100주년을 맞은 마사회는 ‘비전 2037’을 발표하며 15년 이내에 한국 경마 산업을 세계 7위에서 5위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마사회는 경마 산업 5대 선진국인 미국·프랑스·영국·독일·호주를 지향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정작 해당 국가들에선 경마 산업에 이바지한 경주마를 식용은 물론 사료용으로도 활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김정현 (사)대한재활승마협회 이사는 지난 2월 13일 국회에서 열린 ‘퇴역 경주마 복지 개선 토론회’에서 “경마 선진국 5개국은 정부와 관련 기관들이 (경주마 보호) 제도를 만들고 (경마 산업) 목표를 수정한 결과 시민들로부터 말 산업 전반에 관한 일종의 ‘윤리적 허가’를 받은 것”이라며 지속 가능한 경마 산업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란영 제주동물권연구소 소장은 “경마 산업이 발달한 홍콩조차 경주마를 잘 관리해 11∼12살까지 경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경주마를 도축하지 않고 생이 다해 죽을 때까지 관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에선 경주마가 평균 입사 후 2년 만에 퇴역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현재 당국의 퇴역 경주마 펫 사료화 추진은 동물 단체의 거센 반발로 논의가 잠정 중단된 상태다.

퇴역 경주마의 도축 및 사료화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마사회는 현장에서 퇴역한 경주마를 도축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다만 마사회는 2025년 축산물위생관리법에서 한국마사회 법으로 등록된 경주마의 경우 도축 범주에서 제외하는 법령 개정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경주마 생애 주기별 복지 체계 구축 △말 복지 분야 연구 용역 발주 및 전문가 양성 △퇴역 경주마 활용도 제고 △퇴역 경주마 전용 특별 경주 시행(상금 4억 원) 등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고 했다.

당국은 오랜 기간 소외됐던 경주마 및 퇴역 경주마 복지 증진에 공감하면서도 경주마 도축을 법적으로 금지하자는 주장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이정삼 농식품부 축산정책과장은 지난 13일 국회 토론회에서 “제주도에서 매년 900여 마리의 말이 도축되고 인근 식당에 공급되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원명 제주도청 친환경축산정책과장은 “일본에서도 퇴역 경주마가 일정 기간의 비육을 거쳐 도축되고 있다”며 “(말 도축 문제는) 중장기적으로 논의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경주마들의 경기 모습 (사진=이미지투데이)
하지만 재작년 6월 제주도는 식용 금지 약물이 투여된 뒤 휴약 기간 내 도축된 퇴역 경주마 문제로 말고기 품질 논란이 일자 제주산 마육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퇴역 경주마 말고기의 시장 격리’를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더욱이 지난해엔 사행 산업에 이용됐다가 퇴역한 싸움소와 경주마 등 동물 복지에 관한 계획을 정부가 세우도록 책임을 명기한 동물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에 발의돼 현재 논의 중이다. 마사회도 이에 발맞춰 말 복지를 전담하는 ‘말 복지 센터’를 신설한 만큼, 기존의 소극적인 권고 조치를 넘어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