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아나바다'가 뭐죠? 힙한 'n차 신상'이죠"

by정병묵 기자
2022.02.23 16:25:00

<중고거래 폭풍성장>
국내 중고거래 시장 규모 20조원 훌쩍 넘어
코로나 이후 오히려 성장…대기업들도 잇달아 '찜'
실용성·자기주도성 중시하는 MZ세대가 키운 시장
해외 중고거래 플랫폼도 국내 시장 진출 논독

[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 쓰는)’가 뭐죠? 중고는 ‘n차 신상’이죠.”

중고거래가 틈새시장을 넘어 주류로 올라서고 있다. 최근 5년간 공유경제의 확대로 소비자들의 가치관이 소유보다 사용으로 옮겨가면서 성장동력을 확보한 뒤 유통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인스트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기존 온라인 쇼핑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중고거래 장터에서 보내며 거래액도 폭증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중고거래 플랫폼에 눈독을 들이면서 기존 유통 사업과 시너지를 낼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중고장터에 의류를 판매하기 위해 소비자가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사진=안랩)
2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2020년 국내 중고거래 시장은 20조원 규모로, 거래가 본격 태동한 2008년보다 5배 이상 성장한 수준이다. 또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국내 중고거래 앱 이용자는 2015년 160만에서 2020년 10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 으레 범죄도 덩달아 발생하기 마련인데 중고장터 내 사기 범죄 규모만 봐도 성장세를 실감할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중고거래 사기 피해건수는 12만3168건으로 2014년(4만5877건) 대비 세배가량 늘어났다. 같은 기간 사기 피해액이 202억1500만원에서 897억5400만원으로 네 배 증가한 점을 볼 때 거래금액 측면에서도 고성장을 이룬 셈이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 발발 이후 소비심리가 극도로 침체됐지만 중고거래는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작년 기준 3대 중고거래 플랫폼의 가입자수는 중고나라 2400만명, 당근마켓 2100만명, 번개장터 1623만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됐다. 연간 거래액은 중고나라가 5조원대로 당근마켓과 번개장터는 아직 1조원대로 추정된다.

대기업의 잇단 참전으로 중고거래 시장은 더욱 달아오르고 있다. 작년 3월 롯데그룹이 약 300억원을 들여 중고나라 지분 95%가량을 유진자산운용, NH투자증권-오퍼스PE(기관투자형 사모펀드)와 공동으로 투자하면서 업계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신세계그룹 투자사인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올해 초 신한금융그룹, 미레에셋캐피탈 등과 함께 번개장터에 820억원을 투자했다. 아직 대기업의 ‘입질’은 없지만 당근마켓은 기업가치 1조원 이상 유니콘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고거래 광풍의 중심에는 소유보다 사용·경험 중시하는 MZ세대가 있다. 기성세대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가격 굳이 거래까지 해야 되나’라고 ‘체면’을 중시한다면 MZ세대들은 ‘가성비’를 중시하면서 중고 물품 소비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단순히 값이 싸서가 아니라 본인이 지향하는 가치를 찾는 ‘가치소비’를 위해 중고장터에 들어오고 내 취향을 표현하기 위해 중고품을 사고 파는 것을 ‘힙’한 생활로 생각한다는 것. 여기에 특정 품목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디깅(Digging)’도 빼놓을 수 없다. 소위 ‘덕질’로 표현되는 소비 행위를 통해 본인의 취향, 취미 관련 소비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는 얘기다.



최근 중고거래는 점점 세분화, 전문화되고 있다. 중고품을 언택트로 사고 팔 수 있는 중고거래 자판기 ‘파라바라’, 반경 1km 이내 아파트 주민을 타깃으로 한 ‘마켓빌리지’도 거래가 활발하다. 유아용품 전문 ‘땡큐마켓’, 스포츠용품 전문 ‘중고의 신’ 등 품목 위주의 플랫폼도 속속 등장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MZ세대들은 중고상품이 여러 사람을 거쳤어도 상태만 좋으면 된다는 ‘n차 신상’이라고 표현한다”며 “최근 운동화 등 희소 제품을 중심으로 활발한 리셀(재판매) 열풍도 중고거래 플랫폼 급부상에 한 몫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일단 중고거래 앱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 대기업 입장에서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라며 “중고거래 장터에서 나오는 매출도 매출이지만 수많은 고객의 구매 데이터를 기존에 보유한 유통업체의 비즈니스에 잘 접목한다면 그야말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셈”이라고 언급했다.

중고거래 플랫폼 급성장도 중고거래시장을 키우는데 한몫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중고거래 시장이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활발하다. 예전부터 가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동네에서 사고 파는 문화가 정착한 미국에서는 중고명품 거래 플랫폼 ‘더리얼리얼(Therealreal)’이 급성장했다. 일본에서도 최대 중고거래 플랫폼 ‘메루카리’는 메루카리에서 거래되는 시세가 기업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된다는 ‘메루카리노믹스’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중고거래 플랫폼도 한국 서비스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의 세계 3대 중고거래 플랫폼 ‘베스티에르 콜렉티브’는 지난해 말 ‘베스티에르 콜렉티브 코리아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올해 상반기 중 서비스를 시작할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2500억원을 이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거 경기불황 시절 ‘아나바다’ 운동으로 시작한 중고거래가 MZ세대에게는 새로운 소비 문화이자 재테크 수단으로 진화했다”며 “중고장터 거래 품목이 고가품, 명품으로 점점 다양해지는 추세에서 머잖아 기존 유통업계를 위협하는 메인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