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권소현 기자
2015.07.08 17:06:19
채권단 합의로 예금 손실 우려…"실물자산으로 보유하자"
키프러스 사례 지켜본 그리스 국민, 현금 기피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그리스에서 기업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소피아 마르콜라키스(48)씨. 현금을 뭔가 더 안정적인 것으로 바꿀까 고민하다 명품 핸드백을 택했다.
은행이 영업정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고가의 명품백 구매를 상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정부가 뺐을 수 없는 유형자산이기 때문이다.
마르콜라키스씨는 “돈이 그 가치를 잃어가는 느낌”이라며 “이제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리스 은행 영업정지가 1주일을 넘기면서 돈보다 실물자산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그리스 은행에 현금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고 유럽 채권단과의 협상 결과에 따라 예금 일부는 보전받지 못할 것이란 예상에 현금보다 명품백이 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 2013년 키프로스 사태를 지켜본 그리스 국민들은 1월 급진좌파인 시리자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은행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다. 당시 빚에 허덕이던 키프러스는 유로존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예금의 47.5%를 포기했다. 키프로스 국민은 하루 300유로 한도 내에서 찾을 수 있었고, 신용카드 사용액도 매달 5000유로로 제한됐다. 그리스가 키프로스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실제 지난달 말 알렉시스 치프러스 총리가 유로존 채권단과 마찰을 빚으면서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 들었고, 결국 은행 예금인출과 해외 송금을 제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직불카드를 통한 지불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만 상점들은 직불카드 거부하고 있다. 아마존이나 아이튠즈에서 신용카드로 구매하는 것도 막혔다. 현금도 하루에 60유로까지만 찾을 수 있다.
물론 그리스 국민은 돈이 많지 않다. 빈곤율이 44%에 달하고 그리스 은행이 문을 닫은 이후 4만~5만명의 근로자들이 해고됐거나 일시적으로 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이들은 공과금 낼 능력도 없고 음식 같은 생필품을 간신히 구매하는 정도다.
하지만 ‘지금 돈을 쓸 것인가, 나중에 돈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중에 선택하라면 지금 쓰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크리스 다코(25)씨는 “은행이 문을 닫은 이후 일당으로 받은 돈으로 새로운 신발을 살 것”이라며 “최상급의 신발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
올 초 나라가 채무상환에 허덕이고 있는데도 그리스에서는 고급차를 비롯해 자동차 판매가 늘었다. 은행에 돈을 넣어두고 있느니 차를 사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키프러스에서 은행 영업을 제한하기 전, 러시아에서 작년 12월 루블화 가치가 폭락할 때에도 비슷하게 차량 판매가 늘었다. 화폐가치 하락을 우려한 이들이 실물구매에 나선 것이다.
은행 영업정지 전 그리스 아테네의 부자동네인 콜로나키 지역에 있는 니키아스에는 각종 보석과 고가의 롤렉스 시계를 팔려는 이들로 줄이 길었지만, 이제 상황은 정반대다. 고가품을 살 수 있는 문의전화가 하루에도 20~30통 걸려오고 있다.
니키아스 주인은 “전화를 해서는 상점에서 가장 비싼 금 동전과 금괴를 살 수 있냐고 묻는다”며 “하지만 계좌이체는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더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금융시스템에 대한 그리스 국민의 불신을 드러내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치프라스 총리는 삐딱한 유럽 채권자들뿐만 아니라 다년간의 긴축에 지친 그리스 국민들의 신뢰도 회복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