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원자로SW 유출 누가 왜…韓 민감국가 지정 의문점

by김형욱 기자
2025.03.18 13:24:44

美기술유출, 민감국가 지정 배경으로 지목돼
관계부처·주요기관은 연루 가능성에 선 그어
韓정부 차원의 美 기술유출 시도 가능성 낮아
산업장관, 이번주 워싱턴 찾아 지정해제 협의

[이데일리 김형욱 윤정훈 김미영 김인경 기자] 미국 에너지부(DOE)가 올 1월 초 한국을 민감국가(SCL)로 추가한 배경으로 1년여 전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계약직원의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SW) 유출 시도 건이 지목된 가운데, 실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린다.

관계부처와 주요 원자력 공공기관들은 일단 정부나 기관 차원의 유출 시도 가능성에는 선을 그은 채 신중히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외교부는 지난 17일 저녁 미국 정부의 한국의 민감국가 포함과 관련해 “외교정책상 문제가 아닌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 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 문제가 무엇인지는 미국 에너지부 감사관실이 지난해 9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일부 확인됐다. 보고서는 2023년 10월부터 2024년 3월까지 적발된 9건의 비위행위와 그에 따른 조치를 소개했는데, 이중 하나가 한 계약직원의 한국에 대한 기밀유출 시도 건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INL)의 한 계약직원은 국외반출이 금지된 이곳 원자로 설계 SW 정보를 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다가 적발돼 해고됐다. 또 해당 직원의 이메일과 메신저 채팅을 조회한 결과 외국 정부와 소통한 기록을 확인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국토안보국은 현재 이 건을 수사 중이다.

미국 에너지부 감사관실이 지난해 9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 중 한국에 대한 기밀유출 시도 관련 내용. (이미지=미국 에너지부 홈페이지)
우리 정부는 미국 측의 설명을 토대로 한국의 연구원이 INL 등에 출장을 가거나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안 규정을 어겼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 중이다. 또 이번 사례 외에도 추가적인 보안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부 등 관계부처와 주요 원자력 관련 기관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도 직접적인 연루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우선 INL과 공동연구 중이어서 의심을 받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연루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했다. 원자력연구원은 INL과 사용후핵연료 재활용을 위한 파이로프로세싱을 공동 연구 중이다. 이곳 관계자는 18일 “내부 조사 결과 이번 사건과 매칭할 만한 게 없었다”며 “우리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한 다른 원자력 관련 기관도 모두 비슷한 상황이다. 한 관계자는 “1년여 전 적발돼 미국 당국이 조사 중이라면 기관 내에서 모르기 어려울 텐데 현재로선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INL)의 원자로 시험 시설 모습. (사진=INL 홈페이지)
관계부처도 부처·기관 차원의 연루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부처나 기관이 원자로 설계 SW가 필요하다면 상용화한 것을 돈 주고 쓰지 다른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며 “통상적으론 연구소 측과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과기부 관계자는 “한·미 과학기술 협력의 미래에 지장이 없도록 섣부른 추측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정황을 고려했을 때 한국 정부기관 차원의 기술유출 시도는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의 감사보고서에서도 한 계약직원의 기술 반출 시도를 적발했다는 내용만 있을 뿐, 그 직원이 어디 소속이며 반출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해당 직원의 국적이나 해당 직원이 소통했다는 국가도 명확지 않다. 민간 차원의 단순 규정 위반이었거나, 한국을 경유한 제삼국용 반출 시도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안덕근 산업부 장관의 미국 파견을 지시한 데 이어, 이날 오후 외교부·산업부·과기부 차관과 관련 해법을 논의한다. 안 장관은 이번 주 후반께 미국 워싱턴D.C.를 찾아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과 만날 계획이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정부는 2개월 남짓 미국의 위험국가 지정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탄핵 정국에 따른 국정 리더십 약화 속 관계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가 나온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정부는 한국이 포함된 새 민감국가 명단이 확정되기 전에 한국이 빠질 수 있도록 미국 당국과 협상할 계획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새 민감국가 명단을 내달 15일 발효할 예정인 만큼, 우리가 그 이전에 미국 측이 제기한 보안 우려 해소 방안을 내놓는다면 제외될 여지가 있다.

유상임 과기부 장관은 전날 KBS 일요진단에서 “(민감국가 지정으로) 공동 연구 자체가 무산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연구자가 미국 시설 방문을 45일 전에 미리 신고해야 하는 등 불편이 생길 수 있다”며 “무엇보다 대한민국 신뢰 손상 문제이기 때문에 범부처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에너지부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목록[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미국 에너지부 입장에선 민감국가 지정 제도가 산하 연구소를 위한 내부 규정일 뿐인데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로 교체되는 다소 어수선한 시점에 이뤄진 조치여서, 내부에서도 담당자 외엔 이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의 상황 파악이 늦어진 배경이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과 제니퍼 그랜홈 당시 미국 에너지부 장관은 이 조치가 이뤄진 시점인 올 1월8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사실상 한·미 원전 수출 동맹의 시작을 알리는 원자력 수출 및 협력 원칙에 대한 기관 간 약정을 맺기도 했다.

다만, 미국이 한국을 다시 민감국가에서 빼더라도 지정과 해제의 원인은 명확히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지난 1986~1987년과 1993~1996년에도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다가 해제한 바 있으나 그때도 지정과 해제 이유는 알려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