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불쏘시개' 번개탄은 왜 자살 '정부의 적'이 됐나?[이슈산책]

by이연호 기자
2023.02.21 16:15:29

복지부, 자살률 감소 대책에 '번개탄 생산 금지' 명시해 논란
정청래 "마포대교 당장 폐쇄하고 아파트 옥상 못 짓게 하라"
박근혜 정부, "미세먼지 주범은 고등어" 논란과 오버랩되며 논란 확산
복지부 "'번개탄 생산 금지'는 산림청 고시로 내년부터 시행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정부가 캠핑용 숯불과 연탄의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착화탄(이하 번개탄)을 자살률 감소를 위해 생산을 금지키로 하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자살의 주요 수단으로 쓰이는 번개탄 자체를 없애겠다는 일차원적 대책에, 수단을 원인으로 둔갑시켜 정작 필요한 사람들에게 불편만 가중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생명의 다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마포대교. 사진=연합뉴스.
21일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 등에 따르면 복지부는 최근 공청회를 개최해 오는 2027년까지 자살률을 30% 이상 낮추겠다는 목표와 대책을 담은 기본 계획인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안(2023년~2027년)’을 발표했다.

이 대책엔 자살 위험 요인 감소를 위해 번개탄, 농약 등 자살위해수단 관리를 강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중 번개탄과 관련해선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한다”는 문구를 명시했다.

복지부의 기본 계획에 따르면 번개탄 등 가스 중독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는 지난 2021년 2022명으로 전체 사례의 15.1%를 차지했다. 번개탄으로 인한 자살 사망은 2011년 1165명에서 2021년 1763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야당은 정부가 본말을 전도하고 있다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국민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자살 원인이 되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애꿎은 수단을 규제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20일 최고위원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며칠 전에 정부에서 OECD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을 개선하겠다고 발표를 내놨다. 자살 도구로 이용되는 번개탄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고 한다”며 “그러면 마포대교를 당장 폐쇄하라. 아파트 옥상은 지으면 안 된다는 법을 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교도소를 폐쇄하면 범죄자가 안 생기냐”며 “참 기가 차도 이렇게 찰 수가 없다. 윤석열 정부, 거꾸로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도 2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복지부는 자살을 예방하겠다면서 번개탄 생산 금지를 추진하겠다고 하는데 소가 웃을 일”이라며 “번개탄이 없어지면 자살률이 줄어드냐”고 가세했다.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도 “자살 원인에 대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가 더 무섭다”며 “자살을 시도할 수 있는 도구나 장소만 차단하면 뭐하나. 국민 개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은 지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누리꾼들도 정부의 번개탄 생산 금지 대책에 대해 “대책을 통해 ‘안’ 죽게 만들어야 하는데 ‘못’ 죽게 만드는 게 주 목적이냐”, “사회안전망 구축하고 삶의 불안정성을 해결해야 자살률이 줄지 번개탄만 금지하느냐” 등의 비판을 쏟아냈다.



특히 이번 대책은 박근혜 정부 때인 지난 2016년 고등어를 미세먼지 주범으로 지목한 정부의 발표와 오버랩되며 반발을 더욱 키우고 있다. 당시 심각한 미세먼지로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환경부는 실내에서 생선이나 고기를 구울 때 미세먼지가 발생하는데, 그중 고등어에서 오염물질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내용의 자료를 발표했다. 중국발 미세먼지 대책을 촉구하던 국민들은 정부가 미세먼지를 고등어 탓으로 돌렸다며 분노했고, 미세먼지 주범으로 몰린 고등어 가격은 폭락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는 환기를 잘하자는 취지였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번개탄 생산은 이번 자살 대책과 별개로 애초 내년부터는 금지될 예정이었다. 산림청은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은 생산을 금지하는 대신 인체 유해성이 낮은 친환경 번개탄 대체제를 개발할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한다는 것은 산림청의 별도 고시로 제정된 것으로 올해 말까지 유예 기간을 거쳐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안’은 범정부 대책으로 부처별 관련 대책들을 모아 발표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중금속 기준치 초과 검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고시를 통해 생산이 금지되는 번개탄을 자살의 원인처럼 부각시켜 이번 종합 대책에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정부의 자살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비판이 제기되는 모양새다.

앞서 복지부는 지난 2014년에도 국내 한 대학에 용역을 줘 ‘일산화탄소 초저감 착화탄’을 개발했다. 하지만 생산 단가가 30%까지 올라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기존 번개탄에 대한 대체재가 되지 못하면서 기존 번개탄에 대한 규제는 유야무야됐다.

그러다 정부는 지난 2020년 1월 고시를 통해 번개탄 등을 ‘자살위해물건’으로 지정해, 자살을 부추기거나 도울 목적으로 번개탄의 판매 또는 활용 정보를 온라인에 퍼트리면 형사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지난해 12월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김낭희 부연구위원이 ‘형사정책연구’에 게재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위해물건 고시가 제정된 2020년 1월 전후 자살 사망자 통계를 분석한 결과 2020년 한 해 자살위해물건으로 인한 자살 사망자는 2078명으로 2019년의 2497명 대비 16.78% 줄었다.

특히 자살위해물건 중 번개탄 등 일산화탄소의 독성 효과를 일으키는 물질로 이한 자살 사망자가 지정 후 1년 간 가장 많이 줄었다. 일산화탄소로 인한 자살 사망자는 고시 전인 2019년 1999명에서 2020년 1622명으로 18.86% 감소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번 자살예방기본계획안은 이 같은 정부 정책들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며 “기본계획안은 다음달부터 시행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