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유럽…천연가스 가격 치솟고 유로화는 폭락

by방성훈 기자
2022.08.23 19:24:58

러, 독일行 가스 또 끊어…유럽 가스價 1년만에 1000% 폭등
영국도 다르지 않아…"내년 1월 에너지發 인플레 18% 전망"
스태그플레이션 우려에 유로화 급락…1달러=1유로 깨져
"에너지 위기 따른 가장 큰 위험은 정치 연대 붕괴 가능성"

[이데일리 방성훈 김윤지 기자]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정치적·경제적 위기에 봉착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하면서 경기침체 우려가 급속 확산하는 가운데, 국가별 입장 차이에 따라 그 영향이나 대응이 제각각이어서 유럽연합(EU) 연대가 약화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사진=AFP)


22일(현지시간) CNBC 등에 따르면 유럽 가스 가격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9월물 가격은 이날 장중 1메가와트시(MWh)당 전 거래일보다 20.6% 뛴 295유로까지 치솟았다. 마감가는 13.2% 상승한 276.75유로로 지난 19일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244.55유로)를 또 한 번 경신했다. 1년 전 26유로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000% 이상, 지난 10년 평균 대비 14배 이상 뛴 가격이다.

가스프롬이 지난 19일 발트해 해저를 통해 독일로 연결되는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 보수·유지를 위해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한 영향이다. 가스프롬은 보수·유지 작업을 마치고 나면 하루 3300만㎥ 수준의 수송이 재개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하루 1억 6700만㎥이었던 기존 수송 규모의 20%에 불과하다.

가스프롬은 지난달에도 노르트스르팀-1 보수·유지를 이유로 가스 공급을 일시 중단했고, 이후 공급량을 단계적으로 줄이며 기존의 20%까지 축소했다. 시장에선 이 때부터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에너지 무기화’에 나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럽 가스 가격도 이 때부터 지난주까지 5주 연속 상승했다.

이번에 가스 공급이 중단되는 기간은 사흘에 불과하지만, 겨울을 앞두고 또 언제 같은 상황이 연출될 것인지 혹은 가스 공급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가스프롬은 루블화 결제를 거부한 불가리아,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폴란드에 대해선 이미 가스 공급을 중단한 상태다.

베렌베르크 방크의 홀거 슈미딩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명백히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는 유럽 상황을 악용하려는 시도”라며 “러시아는 앞으로도 기술적인 문제를 이유로 가스 공급을 중단해야 한다고 거짓 주장할 수 있고, 독일뿐 아니라 다른 유럽 지역으로 가는 가스관까지 잠글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가계 재정 악화는 물론 기업들의 생산 비용도 증가한다. 전반적인 물가가 상승해 가계와 기업의 구매력이 약화, 부담이 더욱 가중되는 악순환을 유발할 수 있다. 아울러 전력난에 기업들의 조업일수가 줄어들면 경기침체까지 겹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것이란 경고가 잇따르는 이유다.

EU는 이달 초부터 내년 3월 말까지 가스 사용을 15% 줄이는 비상대책에 돌입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침체를 피하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다.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국가는 사실상 유럽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독일이다. EU는 가스 수입량의 40%를, 독일은 55%를 러시아산 가스에 의존해왔다.

슈미딩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이 올 겨울 가스 부족에 시달리게 될 가능성을 높게 점치면서 “이미 심각한 침체 위기에 직면한 유럽 경제가 더욱 악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알렉산드르 드 크루 벨기에 총리도 “유럽 전역이 높은 에너지 가격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며, 일부는 매우 심각하다”며 “유럽은 앞으로 5~10년 간 혹독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U에서 탈퇴한 영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씨티은행은 내년 1월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전년 동기대비 18%를 넘어 정점을 찍을 것으로 내다봤다. EU와 마찬가지로 에너지 가격 급등이 물가 상승 주범으로 꼽혔다. 지난 17일 공개된 영국의 7월 CPI 상승률은 10.1%로, 오일쇼크로 17.8%를 기록했던 1979년 이후 40여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픽사베이)


가스 공급 중단 여파로 침체 우려가 부각되면서 이날 유로화 가치도 급락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유로화는 미국 달러화 대비 0.9934달러까지 떨어졌다. 패리티(1유로=1달러)가 무너지며 2002년 12월 2일 이후 약 2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상 전망에 달러화가 강세를 보인 것도 영향을 끼쳤다.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장중 109.102까지 급등했다.

에너지 위기와 관련해 국가마다 처한 상황이 달라 정치적으로 분열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EU는 이미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를 두고 크게 분열하는 등 홍역을 치른 바 있다. 한 벨기에 정부 관리는 블룸버그통신에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한 가장 큰 위험은 유럽의 연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며 “이는 에너지 시장을 약화시키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에 도달하려는 노력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