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찔 사용한 금관가야 토목공사 흔적, 김해서 나왔다
by장병호 기자
2024.10.22 14:29:14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 과정서 확인
5세기 때 대규모 공사…깊이 4m·길이 100m 추정
24일 오후 2시 발굴조사 성과 공개 설명회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는 사적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5세기에 대지 확장을 위한 금관가야의 대규모 토목공사 흔적을 확인했다고 22일 밝혔다.
|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패각성토층 중 남·동벽 토층. (사진=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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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은 서기 전후부터 532년까지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인 금관가야의 왕궁 또는 왕성으로 알려져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배가 드나드는 접안시설, 창고 건물터, 야철터, 건물터, 조개무지, 환호, 토성, 지석묘 등의 유적을 확인했다.
이번 토목공사 흔적이 나온 곳은 경남 김해시 봉황동 315-1번지(회현동주민센터 앞) 인근이다. 연구소는 봉황대 구릉 동편의 경사면과 평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지 확장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대규모의 패각성토층을 확인하였다.
이는 봉황대 구릉 북동편의 저지대를 매립하여 조성한 것으로 지반 강화를 위해 다량의 조개껍질을 섞어서 경사지게 켜켜이 다져서 쌓은 것이 특징이다. 확인된 최대 깊이는 4m이며 길이는 주변의 봉황토성의 성벽까지 이어질 것을 고려하면 100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 현장. (사진=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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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토 방법은 주로 넓은 대지를 조성할 때 이용되는 것이다. 경주 황룡사터, 부여 금강사터 등 삼국시대 절터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봉황동 유적의 성토층은 이들 유적보다 조성 시기가 앞서고 조개껍질을 섞어서 사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기존에는 탐색 트렌치(Trench, 길쭉하게 판 홈)를 활용해 확인한 토층의 단면만으로 경사 성토 사실을 제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소가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는 밑지름 6~8m 내외, 높이 1m 내외의 둔덕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동심원 모양의 성토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평면 구조가 새롭게 밝혀진 것으로 의미가 있다.
연구소 측은 “과거 봉황대 구릉 주변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일부 확인됐던 봉황토성의 토축 성벽 조사 결과와 이번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 보면 5세기 대에 봉황대 구릉 전체를 둘러싸는 둘레 1.5㎞ 정도의 토축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여진다”고 설명했다.
| ‘김해 봉황동 유적’ 패각성토층 평면 조사. (사진=국가유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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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24일 오후 2시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현장에서 그동안의 조사 성과를 공개하는 설명회를 개최한다. 설명회에서는 가야의 토목기술과 함께 대형주거지와 그간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수습된 중요 유물도 함께 공개한다. 설명회는 참여를 희망하는 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대형주거지는 4세기 대에 조성된 것으로 지난 2017년 일부 공개된 바 있으며, 그 이후로 추가 조사와 연구를 거쳐 내부의 아궁이 시설과 주거지 벽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밝혔다. 출토 유물은 당시 왕성 내의 생활과 의례, 음식 문화, 생산 활동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로, 각종 생활 토기를 비롯해 사슴·고래·상어 등 각종 동물뼈, 복골·모형토기·토우 등 의례행위 관련 유물, 동물뼈로 만든 화살촉·바늘·칼 손잡이 등 생활 공구로 사용된 골각기 유물, 철광석·송풍관 등 야철 작업과 관련된 유물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