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확대경] 행복주택의 성공 조건

by정수영 기자
2013.12.23 18:41:37

[이데일리 정수영 기자] 소득 상위 1% 귀족과 하위 1% 무일푼 백수가 만나 우정을 쌓아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가능하긴 한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면 영화 ‘언터처블’을 보라. 극과 극의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이 만나 오해와 갈등을 겪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영화의 줄거리는 계층간 화해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럼 ‘현실에선 가능해?’ 또 의문 부호를 붙이고 싶겠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소셜 믹스’. 다양한 소득계층을 같은 지역, 같은 공간에 함께 배치해 살아가도록 하는 사회 통합 정책의 하나다. 현재 소셜 믹스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아이디어들이 동원되고 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행복주택’이다. 박근혜정부의 핵심 대선 공약이었던 행복주택 사업은 철도부지 및 유수지(遊水池) 같은 땅값이 거의 들지 않는 공공부지에 짓는 임대주택으로 설계됐다. 공급 물량의 80%가 신혼부부 대학생, 장애인·고령자 등 주거 취약층에게, 나머지 20%도 저소득층 중심으로 공급되도록 계획됐다.

서울 은평뉴타운처럼 한 단지 안에 임대와 분양주택을 섞는 방식은 아니지만, 교통·공원·학교 등 기반시설과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심에 행복주택이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소셜 믹스 효과가 크다. 하지만 지난 5월 정부가 처음 발표한 시범지구에는 목동·잠실 등 중산층이 많이 사는 지역이 대거 포함돼 논란이 됐다. 행복주택이 들어서면 인구 과밀화로 인한 교통 유발, 학급 과밀, 임대료 하락, 집값 하락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정부는 이후 몇 개월간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다 결국 행복주택 규모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시범지구 물량은 1만50가구에서 5000가구로 줄였고, 2017년간 공급할 전체 행복주택도 20만가구에서 14만가구로 축소했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행복주택 시범지구 지역 주민의 의견을 폭넓게 경청하고 주민 요구사항을 최대한 반영한 결과”라고 밝혔다.

행복주택. 말 그대로 서민층에게 가난하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 일환이다. 신혼부부나 대학생, 저소득층이 정부의 지원 아래 교통과 생활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에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한다는데, 이를 무작정 반대하면 지역 이기주의인 ‘님비현상’이 분명하다.

하지만 행복주택의 출발과 추진 과정의 문제점을 보면 주민들의 반대를 무작정 ‘님비’라고 몰아붙일 순 없다. 우선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듣는 과정이 생략된 점이다. 정부 입장에서야 매입부터 해야 하는 민간 토지도 아닌데 주민들의 의견을 무조건 반영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의무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역 주민은 물론 지자체들과도 심도 있는 논의를 사전에 거쳐야 한다.

준비가 미흡했던 것도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공공 부지라고해서 땅값이 거의 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해당 부지를 소유한 공공기관과의 협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철도부지 위에 짓는 것이 생각보다 건설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도 간과한 부분이다. 결국 주된 원인은 ‘불통’에 있었다. 소통도 없이 계획만 거창하게 만들어놓고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새 정부에서도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현재 주민들의 반대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그럼에도 정부는 ‘일단 직진’을 택했다.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14만가구를 모두 공급하기 위해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고 치자. 하지만 되풀이 실수는 안된다. 정부가 영화 ‘언터처블’에서 지금 배워야 할 교훈은 ‘소셜 믹스’가 아니라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