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선일보 기자
2004.03.18 21:59:33
부인 명의로 재산 돌려놓고 “원금 감면” 요구
파산 협박 하기도… “경제 또다른 위기 요인”
[조선일보 제공] “남들처럼 나도 원리금 깎아달라. 아니면 관두자” “자꾸 빚 독촉하면 파산신청하겠다.”
최근 정부가 신용불량자 대책을 쏟아내자 금융회사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은행은 물론 신용카드사, 저축은행, 대부업체에 이르기까지 전 금융권에 걸쳐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채무자들의 빚 안 갚기 행태가 확산되고 있다.
서울의 A대부업체 직원은 정부의 신용불량자 대책이 나온 이후 채무자로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이자는 없던 걸로 하자. 원금도 깎아달라”는 요구를 받는다고 털어놨다.
대졸 출신의 20대 후반 여성은 작년 말 300만원을 빌린 뒤 빚 독촉이 오면 “자꾸 그러면 파산하겠다”고 오히려 협박조로 나온다. 이 여성은 얼마 전 결혼을 했지만 남편에게 빚 상환압력이 돌아갈까봐 혼인신고도 안 하며 버티고 있다고 대부업체 직원은 전했다. B카드사를 거래하는 백모(40)씨는 700여만원을 4개월 이상 연체 중. 모든 재산을 부인 명의로 돌려놓고 막무가내로 원금 감면을 요구해 카드사가 난감해하고 있다. 카드사 직원은 “30% 이상 원금을 깎아주지 않으면 못 갚겠다고 버티고, 부인은 남편 채무인데 내가 왜 갚느냐며 화부터 낸다”고 하소연했다.
C백화점에서 백화점 카드로 330만원을 결제한 뒤 갚지 않은 30대 여성 직장인 박모씨는 “배드뱅크가 설립될 때까지 갚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배드뱅크란 여러 금융회사에 진 개인 빚을 모아 처리하는 기관을 말한다. 채권 추심직원은 “백화점이나 휴대폰 요금 등 비금융회사 채권은 배드뱅크 구제대상이 아니라고 설명하면, ‘조만간 우리 같은 연체자도 정부가 대책을 마련할 테니 기다리라’고 반대로 설득한다”고 어이없어 했다.
금융권은 연체자들이 버티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며 속을 끓이고 있다.
저축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연체율 관리차원에서 신규대출을 안하고 있는데, 과거에 갚지 않은 대출금이 누적돼 악성채무로 뒤바뀌고 있다”고 우려했다. 저축은행 연체율은 지난해 8월 46.8%에서 올 1월에는 53.8%로 상승하며 절반 이상의 대출금이 연체상태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금융감독원은 18일 불법·부당 채권추심 신고센터까지 세우고, 채권추심 관련 민원이 많은 금융회사는 특별실태점검을 실시하겠다고 엄포까지 놨다.
시중은행 채권추심팀의 한 직원은 “빚을 갚아야 할 채무자들이 오히려 은행을 나쁜 놈이라고 비난한다”며 “빚 상환을 재촉하다가 욕먹는 일은 다반사가 됐다”고 말했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는 “선심성 빚 탕감정책은 잠재적인 신용불량자를 양산할 수 있는 망국적 조치”라며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외환위기를 불러온 것처럼 가계의 도덕적 해이는 우리 경제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