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조작해 받은 훈장 취소할 의지 없나”…고문받고 누명쓴 이들의 호소
by최정훈 기자
2019.06.28 14:19:42
28일 국가의 불법적 폭력과 명예회복 토론회 열려
간첩 조작 피해자 “정부, 서훈 취소 대상자 발굴에 소극적”
행안부 “관할 기관 많고 소송 위험 커 서훈 취소 힘들어”
| 2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단체 지금여기에 주관으로 ‘국가의 불법적 폭력과 명예회복 토론회’가 열렸다.(사진=최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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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저도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고문하고 누명을 씌운 사람들은 훈장을 받고 당당하게 살다니요.”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김순자씨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 살아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은 1979년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동해안 경비 상황과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이유로 일가족 12명을 기소한 사건으로 이 중 2명은 1983년 사형이 집행됐다. 2016년 대법원은 이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고문하고 누명 씌운 수사관 등 가해자들에 대한 서훈 취소에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부가 서훈 취소로 인한 소송이 두려워 서훈 취소를 망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증명 자료 확보의 어려움 등을 호소하며 서훈 취소 시스템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항변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국가의 불법적 폭력과 명예회복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발제를 맡은 변상철 지금 여기에 사무총장은 “지난 5월 7일 국무회의에서 울릉도 간첩단 사건,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등의 가해자 8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지만 대상자 16명에 비해 절반 수준이었다”며 “그마저도 8개월에 가까운 긴 시간이 걸렸다”고 전했다.
변 사무총장은 이어 “서훈 취소 대상자 중 동백림 사건 대상자들은 모두 서훈이 취소되지 않았는데 이유가 동백림 사건 피해자들이 재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며 “이미 2007년 국정원이 동백림 사건에 대해 불법연행과 가혹행위, 간첩죄의 무리한 적용이 있었다고 고백했는데도 사법부의 판단에만 의존하며 서훈을 취소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당시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작곡가 윤이상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교민 등 194명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오가고 일부는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기도 했다. 1967년 연평도 해역에서 북한 경비정에 피납된 뒤 귀한한 어부들이 간첩으로 몰린 사건의 피해자 유족인 서진석씨는 “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을 살고 나온 뒤 2008년에서야 무죄를 선고 받았다”며 “형을 살고 나온 뒤에는 간첩이라는 오명 때문에 제대로 일도 할 수 없어 고물을 줍고 살았다”고 했다. 서씨는 또 “무죄를 받은 뒤에도 누명을 씌운 사람의 훈장은 취소 되지 않았고 연금 받고 잘 살고있다”고 토로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지금여기에 법률자문 최정규 변호사는 “최근 서훈 취소는 시민단체와 홍익표 의원실에서 대상자를 파악해 정부에 제공해서 이뤄진 것”이라며 “민간단체가 계속 대상자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정부가 서훈 취소 대상자를 확인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이어 “피해자들이 의원실을 통해 계속해서 가해자들의 서훈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며 “행안부는 재심 판결이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신문이나 뉴스로 밖에 서훈 취소 대상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서훈 추천을 한 국정원, 경찰, 국방부 등에서 서훈 취소에 적극적이긴 어려운 게 당연하다”며 “서훈 취소의 책임이 있는 행안부에서 이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28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시민단체 지금여기에 주관으로 열린 ‘국가의 불법적 폭력과 명예회복 토론회’에서 간첩 조작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있다.(사진=최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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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관련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관할 하고 있는 기관이 많아 서훈 취소 내막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항변했다. 특히 섣부른 서훈 취소로 소송 등 법률적 문제가 생길 위험이 크다고 전했다.
최승현 행정안전부 의정관은 “행안부가 관할하고 있는 상훈이 국회부터 사법기관까지 약 450기관을 총괄하다 보니 서훈 취소 대상 사건의 구체적인 내막까지 알기가 어렵다”며 “직권으로 상훈을 취소했다가 소송이라도 걸려 혹여 지기라도 하면 서훈 취소가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최 의정관은 이어 “50년도 전 사건들이기 대부분이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기록도 거의 없다”며 “서훈을 취소하기 위해서는 거짓 공적이라는 자료가 뒷받침 돼야 하는데 군사 정권 때 관련 자료들을 파기하거나 멸실해 증거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재 상훈법 관련 계류된 법안이 20여개에 달한다”며 “조속한 법 통과로 상훈 취소 제도가 보완되는 게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회를 주최한 홍익표 의원은 “서훈은 국가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 높은 상임에도 받지 말아야할 사람에게 상이 부여된 것은 정의롭지 않다”며 “부실한 기록 문제에 대해 국회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선제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윤종인 행안부 차관도 “지난해 7월 간첩 조작사건 관련자 45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올해도 추가로 8명을 취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서훈 취소를 진행하고 있다”며 “취소 제도의 부족한 부분이 개선돼 효율적인 상훈 시스템이 마련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