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피해자 김진주…피해자다움 거부, 말하기 택했다
by김미경 기자
2024.03.13 13:13:21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김진주|320쪽|얼룩소
자칭 ‘프로불편러’되어 사건 공론화
1268쪽 재판기록…500일간 투쟁기
보호지원대책 촉구, 교육 플랫폼 준비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1000만원이 넘는 병원비에 아버지는 적금을 깨야만 했다. 변호사 수임료는 24개월 카드할부로 끊었다. 다니던 직장에선 잘렸다. ‘개인 정보’, ‘피고인 방어권’이란 미명 아래 가해자 정보에서도 철저히 소외됐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28)씨가 범죄 피해 뒤 겪은 일이다. 그는 2022년 5월22일 새벽 귀갓길에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으로부터 무차별 폭행당하고 바지 지퍼가 열린 채 실신 상태로 발견됐다. 진주씨는 억울했다. 그리고 범죄피해자가 되고서야 깨달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범죄피해자가 보호받는 세상이 아니구나.” 피해자를 외면한 국가(사법체계)에 배신감이 밀려왔다.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또 다른 김진주가 나오지 않도록”. 진주씨는 숨지 않고, 기꺼이 맞서 싸우기로 했다.
책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얼룩소)는 그 500일간의 투쟁기이자, 범죄 피해자를 대변하겠다는 그의 선언이기도 하다. 범죄피해자가 어떻게 ‘싸우는 피해자’로, ‘피해자들의 대변인’으로 나아갔는지 이야기한다. 김진주씨는 최근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너무 길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덕분에 피해자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기다려주고 믿어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필명·28)씨의 저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사진=얼룩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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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피해자 서사’는 처음이다. 진주씨는 범죄피해에 대해 숨기거나 침묵하는 대신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건에 대해 쓰기 시작했고, ‘네이트판’에도 글을 올렸다. “약을 먹지 않고 잠들면 세 시간 만에 깼고, 어쩔 때는 침대 시트가 다 젖도록 땀을 흘려댔지만” 그래도 도망가지 않았다.
‘12년 뒤에 저는 죽습니다’라는 글이 주목받으며 사건을 공론화했다. 기자, PD, 유튜버들의 연락이 쏟아졌다. 그는 인터뷰나 촬영에 적극 참여했고, 자신의 피해 영상을 공개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에도 적극 개입했다. 모든 재판에 참관했다. 국회 국정감사(2023년 10월20일)에도 등장해 “왜 판사가 마음대로 용서하냐”며 양형기준을 비판하고, 피해자 보호 대책을 촉구했다. 재판장에선 최대한 화려하고 근사하게 꾸미고 갔다. 화장도 진하게 하고, 원피스도 입었다. 튀는 가발을 쓰고 간 적도 있다. “무슨 반항심이 들어서였는지 몰라도 이런 피해자도 있다는 걸 재판부에도 보여주고 싶었다. 법정에서 가장 잘 보이는 중앙 자리에 앉았다. 난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으니까.”
| 2022년 5월 부산 부산진구 서면 오피스텔 1층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발로 돌려차는 모습. (사진 제공=연합뉴스TV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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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스로도 ‘가장 밝고 색채로운’ 피해자라고 말한다. 피해자다움을 거부하고, 자칭 ‘프로불편러’가 됐다.
그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제외된 성범죄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1268쪽, 무려 5㎏의 재판기록을 직접 뒤져가며 가해자의 범죄 정황들을 입증해 수없이 의견서를 제출했다. “입고있던 바지 안쪽의 DNA(유전자)를 다시 검사해달라”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해 재판부도 움직였다. 재판부는 검찰 측에 추가 DNA 검사를 요구했고, 이후 공소장에 적힌 혐의는 ‘살인미수’에서 ‘강간살인미수’로 변경됐다. 그 덕에 징역 12년은 20년이 됐다.
국감장에서 고개를 숙였던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의 전화도 받았다. “피해자 보호 제도의 미흡한 점을 묻길래 A4용지 8장 짜리 문서로 정리해 보냈다.” 이후 법무부는 범죄피해지원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7일 법을 개정해 피해자의 재판기록 열람권을 강화하고, 국선변호사지원을 확대했다. 진주씨는 “한동훈 전 장관이 추천사도 써줬다. 너무 감사한 일”이라면서도 “고위직이 나서면 절차도 굉장히 단축된다”고 일침을 날렸다.
그러면서 정치인과 법 관련 관계자들을 향해 “피해자에게 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제도를 만들겠다는 건지, 누구를 위한 법인지 모르겠다. 피해자가 숨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 피해자가 얘기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줬으면 좋겠다.”
그는 시종일관 씩씩하고, 단단했다. 이제는 범죄피해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범죄 커뮤니티를 만든 진주씨는 범죄 대처법 등을 알려주는 교육 플랫폼도 준비 중이다. 현재 창업지원 사업에 계획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했다. 결과는 5월 발표다. 최윤경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는 책에서 이를 ‘외상 후 성장’이라고 설명한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외상을 겪은 후에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으로,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필명 진주란 이름이 퍽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건 피해로 마비됐던 다리가 기적적으로 다시 풀렸던 달, 6월의 탄생석에서 따왔다. “예전엔 운명주의자였다면 삶의 의미를 찾았어요. 돈, 명예, 뭐가 중요합니까. 저는 오늘을 ‘가성비 있게’ 살 겁니다. 하하.”
| 부산 서면에서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혐의를 받는 이른 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가 2023년 6월 12일 부산 연제구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공판이 끝난 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가명)씨가 심경을 밝히고 있다(사진=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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