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동북아 정세…김정은·푸틴 9월 회담 이유는

by김정남 기자
2023.09.05 17:01:48

백악관, '북러 정상회담' 보도 사실상 확인
궁지 몰린 러, 북에 손 벌려 무기 지원 요청
한미일 맞선 북중러 밀착, 동북아 정세 요동

[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김정남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르면 다음주 전격 회동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러 정상회담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군사 자원을 주고받는 거래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보다 한미일 동맹에 맞서 북중러 밀착을 가속화한다는 ‘큰 그림’에 더 이목이 쏠리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북러 정상회담을 사실상 확인하면서 경계감을 드러내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에이드리언 왓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4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김 위원장이 이달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대통령과 만날 것’이라는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대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 거래를 놓고 ‘정상급 논의’(leader-level talks)를 예상한다”며 사실상 확인했다. NYT는 미국 정부 소식통 등을 인용해 “두 지도자가 오는 10~1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연방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리는 동방경제포럼(EEF)에서 만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는 9일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9·9절) 직후다. 김 위원장이 수도 모스크바로 곧바로 갈 가능성도 있다.

외교 관계, 경호 등의 민감성을 고려할 때 백악관이 북러 회담 정보를 사전에 공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미국 정부가 두 나라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왓슨 대변인은 “우리는 김 위원장이 러시아에서 정상급 접촉을 포함해 이런 대화를 지속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정보가 있다”며 “북러 무기 협상은 활발하게 진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악관은 이미 지난달 30일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이 무기 협상과 관련해 서한을 교환했던 사실을 공개했던 적이 있다. NYT는 “(백악관의 북러 회담 관련 정보 공개는) 지난번 경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국면에서 북러 유대관계가 노골화하는 점을 두고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북러 양국이 만날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러시아는 길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춰 대규모 탄약과 대전차 미사일 등을 북한으로부터 받기를 원하고 있다. 러시아는 각종 제재 탓에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돼 있다. ‘잃을 게 별로 없는’ 북한과 거래에 나설 정도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는 안보리 결의를 밥 먹듯 위반하는 북한과 대놓고 군사 협력을 하는데 부담이 있었지만, 이제는 북한이라고 배제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각종 무기를 지원하는 대가로 핵 탑재 미사일을 위한 위성 발사 기술, 핵 추진 잠수함을 운용하기 위한 첨단 기술 등의 이전을 러시아에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 연장선상에서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전후해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해군 함정들이 정박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33번 부두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500㎞ 떨어진 보스토치니 첨단 우주기지를 각각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식량 지원도 요청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한다면 2019년 4월 푸틴 대통령과 만난 이후 거의 4년반 만에 해외 순방길에 나서는 것인데, ‘마음이 급한’ 러시아를 정상외교 재개의 파트너로 삼았을 것으로 점쳐진다.

이번 정상회담은 동북아 신냉전 구도가 심화하는 와중에 한미일에 맞선 북중러 밀착 과정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미일 정상이 지난달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북핵을 넘어 인도태평양으로 넓히는 3국 협력을 발표하자, 북한은 ‘아시아판 나토’ ‘반(反)중·러 포위 흉책’ 등을 골자로 한 비난 담화를 발표했다. 실제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직후 북중, 중러 밀착 기류는 더 짙어졌다. 푸틴 대통령이 다음달 ‘일대일로 포럼’ 참석차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추진 중인 게 대표적이다. 또 시 주석은 푸틴 대통령이 불참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예상을 깨고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뒤늦게 알렸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행사에서 자칫 ‘들러리’로 전락할 위험을 경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이 러시아에 이어 이른 시일 안에 중국을 직접 찾을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북한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이유로 2020년 1월 국경을 닫고 다른 나라들과 인적 왕래를 전면 중단했다가, 지난달 말부터 중국과 하늘길을 전격 개방했다. 중국 당국은 북한 국영 항공사인 고려항공에 대해 주 3회 평양·베이징 노선 운영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미국 내부는 북중러 공조를 두고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그 의미를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다. 미 육군 예비역 중장인 마크 허틀링은 CNN에 나와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회담은) 가장 유명한 ‘왕따 국가’들의 두 지도자가 모이는 것”이라면서 “(북한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벼랑 끝에 몰린) 푸틴이 도움을 얻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무기 지원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세 자체를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는 견해 역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