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절단기 쓰고 불법사찰까지…밀양송전탑사건, 경찰 규정 어겼다

by박기주 기자
2019.06.13 12:00:00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발표
농성 인원 100여명에 수천명 경력 동원, 무분별하게 칼·절단기 사용도
주민에 대한 불법 사찰도 강행
한전, 절차적·민주적 정당성 무시하고 송전탑 건설
진상조사위 "경찰청장이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 세워야"

△밀양·청도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들 (사진= 연합뉴스)


[이데일리 박기주 기자] ‘밀양·청도 송전탑’ 건설 반대 활동을 막는 과정에서 경찰이 원칙을 벗어난 과도한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또한 경찰이 반대 주민에 대한 불법사찰과 특별관리·회유 등 공권력을 행사해 주민들 간 갈등을 가중시켰다고 봤다.

이에 대해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경찰청장이 직접 이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 등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진상조사위는 13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밀양·청도 송전탑 건설사건’의 조사 및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8개월간 진행됐다.

이 사건은 지난 2003년 송전 선로가 지나가는 지역으로 밀양과 청도 등이 확정되면서 시작됐다. 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주민 의견 수렴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송전탑이 주민의 건강권과 재산권을 침해할 우려 탓에 주민들은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발생한 갈등을 막기 위해 경찰력이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반대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와 과도한 통행제한, 불법 사찰 등이 발생하면서 논란이 빚어졌다.

진상조사위의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송전탑 및 송전선로 건설 사업을 ‘국책 사업’으로 여기고 송전탑 건설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나 활동들을 정보력과 물리력을 동원해 저지했다.

경찰은 한전과 공사재개에 따른 경력의 지원 일정과 투입 인원 및 배치, 차량 통제 방안 등까지 협의할 정도로 공조했다. 실제 농성하는 사람들은 100여명에 그쳤는데, 많게는 2700명의 경력이 동원될 정도로 많은 수의 경찰이 투입돼 반대주민 등을 체포·연행하고 해산시켜 송전탑 공사가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밀양에서 경찰은 ‘3선 차단’ 개념으로 송전탑 반대주민에 대한 통행제한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반대주민과 활동가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통행을 제한해 이동권을 침해했다는 게 진상조사위의 설명이다.

특히 2014년 6월 밀양에서 진행된 행정대집행 땐 송전탑 건설 부지에 주민이 설치한 움막에 경찰이 투입돼 내부에 사람이 있는데도 칼로 천막을 찢고 주민이 목에 매고 있던 쇠사슬을 절단기로 끊어내는 등 주민들의 안전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칼·절단기 등 도구를 사용했다. 농성자들을 밖으로 끌어낸 후 특별한 안전조치나 병원 후송 없이 방치하는 상황도 곳곳에서 벌어졌고, 옷을 벗은 고령의 여성 주민이 남성경찰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오는 일이 발생하는 등 진압 과정에서 인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사례들이 드러났다.

같은 해 7월 청도에서는 농성 주민의 수십배에 달하는 경찰력이 투입돼 주민이 설치한 텐트를 부수고 주민 등을 담요에 말거나 의자째 들어내는 방식으로 옮겨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부상을 입는 등 안전조치나 인권보호가 미흡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진상조사위는 경찰이 필요최소한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의무 및 공정·중립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봤다.

△2013년 밀양 송전탑 관련 현황 보고(자료= 밀양경찰서)
정보경찰이 업무의 범위를 벗어나 주민들에 대한 일상적 채증을 비롯해 불법사찰·특별관리·회유 등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한 것도 문제라고 봤다.

실제 경찰은 송전탑 건설 반대주민의 불법행위가 발생하기도 전에 일부 주민의 이름과 나이· 처벌전력 등을 파악해 검거 대상으로 분류, 전담 체포·호송조를 편성해 마을별로 배치했고 경찰관별로 특정주민을 배당해 정보활동을 하도록 했다.

또한 정보관들이 반대 주민을 설득하도록 했는데, 주민들은 경찰의 이러한 활동을 회유와 협박으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신분과 소속 등을 밝히지 않은 채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는 등 광범위한 채증을 하기도 했다. 갈등 국면에서 한 주민이 분신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경찰은 이를 우연한 사고로 축소하려는 시도를 한 정황도 발견됐다.

진상조사위는 이와 함께 송전탑 설치와 관련해 한전이 계획 단계부터 절차적·민주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진행한 사실도 지적했다. 송전탑 건설사업의 이해당사자인 주민들에게 사업추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주민들의 의견수렴 절차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송전탑이 건설될 경우 주민들이 전자파에 노출돼 암 등 질병에 취약한 상황에 처할 수 있고, 보유하고 있는 토지의 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등 주민들의 건강권과 재산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유발할 수 있었음을 한전이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전이 주민에 대한 충분한 설명없이 강행한 것은 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주의의무를 져버린 행위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한전과 경찰 등의 행위로 밀양·청도 주민들은 현재 정신적·신체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밀양 주민들에 대한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 유병률은 전쟁 및 내전 등을 겪은 후에 조사한 비율보다 더 높게 나왔고, 청도 주민 역시 조사 대상자 모두가 고위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을 보였다.

유남영 진상조사위 위원장은 “한전은 스스로 사람 중심의 인권경영선언을 통해 국내외 사업지역 주민의 인권을 존중하고 인권침해 사전예방과 적극적 구제 노력 등을 약속하고 있다”며 “송전탑 건설에 따른 주민들의 재산적 피해에 대한 적정한 보상을 비롯해 정기적인 건강권 침해 여부 조사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상조사위는 이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경찰청장이 이 사건의 심사 결과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고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공공정책 추진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방안을 마련하고, 정보경찰의 업무와 역할을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 등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