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 구긴 공정위, 갈수록 칼날 무뎌지나(종합)

by박종오 기자
2016.05.11 14:40:00

5년간 환율담합 면세점 8곳에 과징금 '0원'
38개월 부당이익·소비자 피해에도 솜방망이 처분
라면값 사건 대법 패소 이후 무혐의 잇따라
은행 CD 담합혐의 등 후속 사건에 파장 '촉각'

[세종=이데일리 박종오 최훈길 기자] ‘경제검찰’ 공정거래위원회가 환율을 짜고 치는 식으로 상품 판매가격을 담합한 면세점 사업자에게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으름장만 놓고 다시 칼집에 칼을 넣었다. 면세 사업자 심사에서 탈락한 롯데와 SK(034730)는 기사회생의 청신호가 켜졌다. 반면 은행 CD 담합 혐의 등 굵직한 사건처리를 앞둔 공정위는 ‘솜방망이’ 처분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4일 정부 세종청사 공정위 건물 4층 심판정에 공무원과 기업인, 변호사 등 60여 명이 모였다. 이날 이곳에서 공정위 최고 심의·의결기구인 전원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8개 면세점 사업자의 가격 담합’이었다. 롯데(호텔롯데·부산롯데호텔·롯데디에프글로벌·롯데디에프리테일)·호텔신라·동화면세점·에스케이네트웍스·한국관광공사 등 8개 회사는 공항·시내 면세점을 운영하면서 환율을 담합한 혐의를 받았다.

면세점은 통상 달러로 표시한 가격으로 물건을 판다. 8개 사는 국산품의 이 달러 표시 가격에 자기들끼리 임의로 정한 환율을 적용해 업체 간 가격 경쟁을 없애고 값을 올려받았다는 것이 공정위 판단이다.

예컨대 외환은행이 고시하는 시장 환율이 달러당 1000원이라면 1만원짜리 홍삼 세트는 면세점에서 10달러에 팔아야 한다. 하지만 사업자들이 짜고 달러당 800원의 환율을 공동으로 적용할 경우 판매 가격은 12.5달러로 올라간다. 환율을 내려 2달러 넘는 차익을 얻는 셈이다. 이 회사들의 담합 횟수는 2007년 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5년간 14차례에 달했다.

정재찬 공정위원장 등 상임·비상임위원 8명이 회의장 전면에 착석하자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김재신 기업거래정책국장 등 공정위 직원 3명이 검사 역할인 심사관으로 나섰다. 8개 사는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등 17명을 법률 대리인으로 내세워 변론을 펼쳤다.

기업 변호인단은 모두 순순히 환율 합의 사실을 인정했다. 롯데 측 대리인인 율촌 변호사는 “재발이 없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선처를 부탁드린다”며 처음부터 읍소 전략을 폈다. 호텔신라 측 변호사는 “가격 인상 의도가 없었고, 초과 이익을 얻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동화면세점과 에스케이네트웍스(워커힐), 관광공사를 대리한 지평·세종·화우 변호인들은 롯데와 호텔신라로 화살을 돌렸다. 대기업이 시킨 대로 한 것일 뿐이니 처벌 수위를 낮춰달라는 이야기다.

기업들이 공통으로 항변하는 쟁점은 대략 3가지로 압축됐다. “△환율을 합의한 것은 정해진 법적 요건이 없는 상황에서 매일 요동치는 환율에 맞춰 가격표를 바꾸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택한 불가피한 조처다 △적용 환율을 공동으로 정하긴 했으나 이후 자체 할인 등 별도의 가격 정책을 통해 최종 가격을 결정했으므로 경쟁을 제한했다고 볼 순 없다 △ 면세점에서 출국자를 대상으로 판매하는 물품은 수출품과 마찬가지여서 국내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을 제한했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공정위가 업체가 환율 담합으로 챙겼을 부당 이득 규모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추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과징금 처분이 없게 됐다. 김재신 기업거래정책국장은 “비교할 만한 지표를 찾는 게 쉽지 않았고 다양한 할인도 있어서 최종적인 소비자 피해를 계량화하는 게 불가능 했다”며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부당이익이 적다는 게 위원회 최종 판단”이라고 말했다.

전원회의 위원들은 사실상 사업자 손을 들어줬다. 8개 사에 ‘시정 명령’을 내린 것이다. 시정 명령은 공정위가 부과할 수 있는 처벌 중 ‘경고’ 다음으로 수위가 낮다. “다음부터는 담합하지 말아라. 또 걸리면 가중 처벌한다”는 정도의 의미다. 담합 기간 매출액의 최대 10%까지 부과할 수 있는 과징금도 단 한 푼도 매기지 않았다.

면세점 운영사는 웃게 됐다. 롯데 월드타워점과 에스케이네트웍스 워커힐점은 작년 면세 특허 재승인에 실패해 이달 또는 다음 달 문을 닫을 판이다. 최근 정부가 서울에 신규 면세점 4곳을 추가하기로 해 부활의 길이 열렸지만, 공정위 판결에 따른 여론 압박이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담합 혐의 처분을 받은 이들 면세점들이 신규 특허를 신청하는데 불이익은 없을 전망이다. 지난 3월 정부가 발표한 ‘보세판매장(면세점) 제도 개선방안’에 규정된 신규 특허 신청 금지 규정은 담합 혐의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호근 기획재정부 관세제도과장은 “5년간 신규 특허를 금지하도록 한 규정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에 적용된다”며 “이번 담합 처분과 신규 특허 신청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공정위는 입맛이 쓰게 됐다. 공정위는 이번 면세점 담합 사건 조사에 2012년부터 최근까지 4년여를 쏟아부었다.

지난해 12월 농심을 제기한 라면값 담합 과징금 소송에서 대법원 최종 패소한 이후 공정위는 가격담합 혐의에 ‘경징계’ 처분을 내려왔다. 공정위는 지난 3월 설 명절용 선물세트 판매가격을 담합한 이마트, 홈플러스(테스코), 롯데마트의 담합 혐의와 관련해 과징금 없이 ‘심의절차종료’ 처분을 내렸다. 당시에도 기업거래정책국 유통거래과가 담합 혐의를 적용해 심사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전원회의 위원들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심의를 종료했다.

이를 두고 무리한 법 적용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소극적인 ‘솜방망이’ 담합 처벌을 우려하는 지적이 많았다. 상반기 중으로 공정위는 은행 CD 담합 혐의 등 굵직한 담합 사건을 전원회의에 상정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전원회의 결과가 1심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 판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과거보다 담합 판단이 신중해진 것이지 소극적인 처분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용어설명> 시정명령

공정위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부당한 공동행위(담합) 등에 대한 시정조치로 경고, 시정명령, 과징금, 고발 등을 할 수 있다. 시정명령은 사업자에게 해당 행위의 중지 등을 명하는 조치로 경고 다음으로 수위가 낮은 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