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혜선 기자
2022.07.06 13:28:10
세계는 인플레로 고통받는데 일본은 웃는 이유
ODCE국 물가 9.6% 오를 때 일본은 2%대 ‘찔끔’
그래도 안 쓰는 일본...코로나에 쌓인 ‘강제저축’ 풀릴까
[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한달 용돈 2만 1000엔. 한화로 약 20만원이 조금 넘는 용돈으로 살아가는 일본 가장을 그린 만화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발되지 않았지만 ‘일본 절약만화’나 ‘일본 가장의 현실’이라며 일부 만화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돌아다녔죠.
요시모토 코우지 작가의 ‘정액제 남편의 용돈 만세’에는 일본인들의 눈물나는 절약 습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은 작가 자신인 ‘요시모토 코우지’입니다. 담배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지만 달달한 과자를 사먹는 것으로 여가를 만족하며 살고 있죠. 늘 쪼들리는 용돈에 아내에게 용돈을 올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내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런 아내의 용돈은 월 7000엔, 한화로 6만 7천원 가량입니다.
만화에는 요시모토씨 외에도 다양한 ‘짠돌이’가 등장합니다. 여름엔 테니스를, 겨울엔 스노우보드를 즐기던 초등학교 선생님 다케다 씨는 자신의 청춘이 담긴 취미용품을 중고상점에 3천 엔에 처분하고 1100엔 짜리 구닥다리 게임기 ‘패미컴’을 구입합니다. 그런 다케다 씨의 한달 용돈은 1만엔입니다. 만화에서 이들은 서로의 절약 방법을 공유하며, 다음 달에는 더욱 절약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최근 일본에서도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상당하기에, 이 만화는 많은 공감을 받았습니다. TV도쿄같은 유명한 방송사 프로그램에서도 인터뷰로 소개되고, 일본 아마존 후기에는 “1권 때 용돈은 술도 마시고 매달 5만 엔을 쓰는 극도의 낭비를 했다”며 “4권을 읽는 지금은 3만 엔 안쪽에서 생활한다. 지금이 행복을 느낀다”는 내용도 볼 수 있습니다.
전세계 초 인플레에도 일본은 웃는다
서민들의 짠내나는 노력이 안타깝게도, 전세계는 ‘고물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에서는 ‘오히려 좋아’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달 6일 “가계의 가격 인상 허용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물가 상승을 긍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일본 가계는 물가 인상을 견딜 수 있다는 거죠. 오히려 일본 정부의 ‘물가 상승률 2%’ 목표치를 꺼내들며 일본의 물가 상승이 “중요한 변화”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바로 이 발언이 지적되어 사과하기는 했는데, 인플레이션 저지를 위해 세계 각국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라기엔 과하죠. 구로다 총재는 왜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반기고 있을까요?
이유는 일본의 고질적인 디플레이션 때문입니다. 물가 상승률 2% 목표치는 지난 2012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일본의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목표치입니다.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장기간 재정 완화 정책을 펴왔는데, 그럼에도 꿈쩍하지 않던 일본 물가가 이번에 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사실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인플레이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지 않습니다. 5일(현지시간) OECD에 따르면, 5월 OECD 38개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 평균은 9.6%로 집계됐습니다. 그에 반해 일본은 2.5% 상승에 그쳐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죠. 구로다 총재 역시 일본의 인플레가 생각보다 심하지 않으니 거시경제학자의 입장에서 ‘견딜만 하다’고 본 것이죠.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조셉 가뇽 선임 연구원도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세계 주요국의 인플레이션 원인을 짚으면서 “지금까지 일본은 인플레이션에 있어 글로벌 패턴에서 벗어나왔다”며 “일본은 긴축 통화 또는 재정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진단했습니다.
죽어도 안 쓰는 일본인의 ‘강제저축’
구로다 총재가 ‘견딜만 하다’고 본 또다른 이유는 일본 가계가 차곡차곡 쌓아둔 ‘강제저축’입니다. ‘강제저축’은 일본은행이 지난해 4월 보고서에서 처음 쓴 표현인데, 코로나19로 소비가 줄어들면서 모아둔 돈을 말합니다. 일본은 이 강제저축액이 지난 3월 기준 55조엔(약 542조 4500억원)으로 불어났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이렇게 쌓인 저축을 코로나19 확산이 완화되면서 ‘보복 소비’로 시장에 풀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너무 낙관적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본 가계는 버블경제 붕괴 이후로 물가 상승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해왔습니다. 일본의 장기 불황의 큰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요인이 바로 소비 침체입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제약이 풀리기 시작한 올해 상반기에는 생각보다 일본의 가계 지출이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일본 총무성 발표에 따르면, 실질 가계지출(2인 이상 가구)은 지난 1월 6.9% 반짝 올랐다가(전년 동월 대비), 2월에는 1.1% 상승에 그치고 3월에는 ?2.3%, 4월 ?1.7%로 감소세에 접어들었습니다. 물가 상승과 역대급 엔저 현상으로 불안감을 느낀 일본 시민들이 허리띠를 더 졸라맨 셈이죠.
한편, 일본 정부가 기대하는 물가 상승은 ‘나쁜 인플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계 임금의 인상이나 경제 성장 등 긍정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등 해외 충격 때문에 이뤄졌기 때문에 ‘나쁜 인플레’라는 것입니다. 당분간은 요시모토 씨의 ‘짠돌이 생활’이 이어질 듯 합니다.